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처음에는 유암사(留巖寺)라 하였다. 광종은 이곳에서 약사도량(藥師道場)을 열었는데, 매일 재(齋)를 올릴 때마다 정족수(定足數)의 승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는 한 사람의 수효가 모자랐다. 그래서 지나가는 초라한 승려 한 사람을 불러들여 좌석을 채우고, 희롱조로 “말비구(末比丘)는 왕궁의 재에 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승려가 “너도 약사를 친히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허공을 날라 이 절의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에 절을 크게 중창하여 불은사라 하고 숭신(崇信)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종 때에는 왕태후가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고, 의종 때에는 최윤의(崔允儀)의 유골을 이 절의 보리원(菩提院)에 안치하였다. 또한 1298년(충렬왕 24)에는 충선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영궁기지(營宮基地)를 보고 덕자궁(德慈宮)을 건립하였는데, 이 덕자궁은 충렬왕이 보위에서 물러나 거주했던 곳이다.
그 뒤 고승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玄悟)가 1324년(충숙왕 11)에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하게 되었을 때 이 절의 약사여래에게 기도하여 완쾌된 사실에 보은하기 위하여 1338년(충숙왕 복위 7)부터 약 20년에 걸쳐 중창하였다. 현오의 중창 전에 이 절은 난리로 인해 불타고 원래의 절터에서 동쪽으로 옮겨 집을 짓고 이름만 따랐던 것인데, 현오가 원래의 자리에 큰 절을 이룩한 것이라고 한다.
이상의 기사 외에도 이 절은 고려왕들의 잦은 행차가 있었다. 1106년의 예종 행차를 비롯하여 고종 · 충선왕 · 공민왕 등이 자주 이 절에 행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의 폐사에 관해서는 전혀 전하는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