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해는 조선시대에 한문이나 백화문 원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 또는 번역한 작품이다. 언역(諺譯) 또는 언석(諺釋)이라고 한다. 한글로 된 번역과 함께 문단으로 나누어진 원문이 대조되어 놓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조된 원문에는 한글로써 구결을 다는 것이 보통이다.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의 발문에 의하면, 원전에 구결을 먼저 달고 그 구결에 따라서 번역이 행해졌다고 한다. 원문의 구결은 번역과 함께 원전 이해의 길잡이로 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언해서는 개화기 이전 한글 문헌의 주종으로서 다양한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국어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문의 원전에 한글로 구결을 달아 해석한 것을 ‘언토(諺吐)’ 또는 ‘언두(諺讀)’라 부르는 것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한글로 번역한 것을 ‘언역(諺譯)’ 또는 ‘언석(諺釋)’이라고 한다.
위의 정의에 따라서 언해는 다음의 두 요건을 갖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첫째, 한문이나 백화문의 원전을 대상으로 하는 번역이다.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사용되던 몽고어 · 만주어 또는 일본어의 학습서를 한글로써 번역하는 일이나 번역한 책은 언해가 아니다. 백화문인 중국어의 학습서, 예컨대 『노걸대(老乞大)』를 번역한 경우에 『번역노걸대』 또는 『노걸대언해』라 한 것이다.
둘째, 한글로써 행해진 번역이다. 한글에 한자가 혼용된 번역도 언해가 되나, 이두로써 번역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등은 언해라 할 수 없다.
이두에는 새김과 음이 차용된 한자만 쓰이고 한글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 언해의 특징으로 한글로 된 번역과 함께 대문, 곧 문단으로 나누어진 원문이 대조되어 놓이는 사실이 지적된다. 『석보상절』이 그 서문에서 『석가보(釋迦譜)』의 번역이라고 하였지만, 원문이 대조되지 않았으므로 언해라 하기 어렵다.
대조된 원문에는 한글로써 구결을 다는 것이 보통이다. 언해의 전형적인 예인 간경도감 간행의 불경언해와 교정청 편찬의 경서언해에는 구결이 달린 원문과 번역이 짝지어 놓인다. 이러한 원문의 구결은 번역의 절차와도 관련된다.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의 발문에 의하면, 원전에 구결을 먼저 달고 그 구결에 따라서 번역이 행해졌다고 한다. 구결은 원문의 문맥을 분명히 하기 때문에, 구결만 확정되면 번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원문의 구결은 번역과 함께 원전 이해의 길잡이로 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언해는 한글창제 이후에 시작되어 개화기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빠른 예는 『월인석보』의 권두에 실려 전하는 1447년(세종 29)의 ‘석보상절서(釋譜詳節序)’와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훈민정음언해』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언해가 크게 행해진 시기는 세조 때이다.
간경도감에서 『능엄경언해』 · 『법화경언해』 등 10여 권의 불경이 언해되었던 것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구급방언해』가 간행되고, 성종 때에 들면 『삼강행실도언해』 · 『내훈』 · 『두시언해』 등이 간행되어 언해는 의학 · 교화 · 시가 등 다방면의 문헌으로 확대되어 행해졌다.
중앙에서만 간행되던 언해서가 16세기에 들면서는 지방에서도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언해의 확대는 한글을 보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문자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번역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한문 원전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여 문화의 향상과 학문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은 영조 · 정조 때, 곧 18세기 후반에 가장 많은 언해서가 간행된 점이다. 교화서와 역학서(譯學書)의 대대적인 번역, 30여 종의 윤음언해(綸音諺解)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 앞서 간행된 언해서도 이 시기에 상당수가 중간되었던 것이다. 이는 그때가 이른바 문예부흥기임을 말하는 사실이지만, 뒤집어보면 한글이 널리 보급되어 한글문헌의 독자층이 그만큼 두터워진 것을 말한다.
언해는 이러한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오늘날에는 역사적 연구자료를 제공하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예컨대, 선조 때 교정청에서 편찬된 경서언해는 간경도감 간행의 불경언해보다 약 100년이나 뒤지는데, 이는 우리나라 유학의 발달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교정청의 경서언해와 이이(李珥)의 사서언해, 그리고 15, 16세기의 경서와 『소학』의 구결과 번역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는 유학사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한편, 언해서는 개화기 이전 한글문헌의 주종으로서 다양한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국어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5세기 이후의 국어사연구는 이들 자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