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결 ()

금강반야바라밀경 / 서문 및 내용의 구결
금강반야바라밀경 / 서문 및 내용의 구결
언어·문자
개념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이나 독송을 위하여 각 구절 아래에 달아 놓는 표기법. 토 · 입겿 · 현결 · 현토.
이칭
이칭
토, 입겿, 현결, 현토
정의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이나 독송을 위하여 각 구절 아래에 달아 놓는 표기법. 토 · 입겿 · 현결 · 현토.
개설

구결이란 말은 기원적으로 구수비결(口授秘訣)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스승이나 대학자가 파악한 경전(經典)의 내용을 제자에게 전한 것이 계속 이어지는 데서 구결이란 용어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토라는 말은 구두(句讀)의 두(讀)에서 온 것으로 한문의 구두에 우리말을 첨가하는 데서 온 말이 아닌가 한다. 토는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가 주를 이루고 조동사나 말음첨기(末音添記)를 한 것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구결과 토를 구분하지 않은 듯 한문에 토를 다는 것을 현토(懸吐)라고도 하고, 현결(懸訣)이라고도 하였다. 현결(懸訣)이란 ‘구결을 단다’는 뜻이니 토를 구결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또 구결을 ‘입겿’이라고도 하였다. ‘입’은 ‘구(口)’를 번역한 것이고, ‘겿’이란 ‘어조사(語助辭)’라는 뜻이니 이는 구결(口訣)을 번역하여 차용한 말로 보인다.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데에 구결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세조(世祖) 때에는 주역구결(周易口訣)에 대하여 문신들을 좌우로 나누어 전강일(殿講日)마다 신랄한 토론을 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는 경서에 구결을 정하는 것이 그 내용을 해석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결은 경서의 내용에 직결되는 것이고 토는 그 구결을 실현시키기 위한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연원 및 변천

구결은 이 땅에 한문이 들어와 체계적인 학습을 하게 되면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대학(大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으니 이 때에는 구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도 이 무렵에 박사(博士)가 있었으니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이 있었고, 이에 따라 구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이보다는 늦지만,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51)에 ‘국학(國學)’을 설치하였으므로, 이 때에는 경전(經典)의 구결이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구결은 구전(口傳)되는 것이어서 토(吐)의 표기법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국 시대의 이두문(吏讀文)이 한문과 우리말의 어순을 섞어서 기록하거나 완전히 우리말의 어순으로 배열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토의 표기를 보여 주지 않는 사실이 말해 준다.

토(吐)의 표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해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설총(薛聰)이 구경(九經)과 문학(文學)을 우리말로 읽어 그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한 13세기말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설총이 경전에 토를 달아 우리말로 석독(釋讀)하는 구결을 지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의상(義湘)의 화엄경 강의를 집록(集錄)한 『요의문답(要義問答)』2권과 『일승문답(一乘問答)』2권에 방언(우리말)이 섞여 있다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말로 볼 때, 설총보다 한 세대 앞서는 시기에 토의 표기법이 발달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일본 나라(奈良)시의 동대사(東大寺) 도서관에 소장된 8세기 중엽의 신라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에 신라어의 석독구결이 각필로 기입되어 있는 것이 발굴되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석독구결은 13세기 중엽까지의 자료가 남아 있어 이 시대까지 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순독구결(順讀口訣)은 14세기 초의 자료가 발굴되어 있어 이 시대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과거제도가 확립되고 12공도(公徒)의 사학(私學)이 설립되었던 12세기에는 과거에서 제술업(製述業)이 중시되어 한문의 암송과 동시에 그 뜻도 이해할 수 있는 순독구결이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에 오면 석독구결은 그 기능을 언해(諺解)에 물려 주고, 순독구결이 보편화되어 구결이라 하면 곧 이 순독구결을 가르키게 되었다.

석독구결은 토를 문자로 기록하는 자토석독구결(字吐釋讀口訣)과 토를 점과 선으로 기입하는 점토석독구결(点吐釋讀口訣)로 나뉘어진다. 자토석독구결은 현재 다음과 같은 7종의 자료가 발굴되어 있다.

  1. 일본의 동대사 도서관 소장의 화엄경사경(권12~권20): 740년대

  2. 균여(均如)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抄): 960년대

  3. 화엄경소(華嚴經疏) 권35: 11세기말

  4. 화엄경(華嚴經) 권14: 12세기전반기

  5.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 권3: 13세기 전반기

  6. 구역인왕경상(舊譯仁王經 上)의 낙장 5매: 13세기 중반

  7.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20: 13세기 중반

1)은 740년대의 사경으로 추정되는 화엄경의 절약본(節約本)에 각필로 기입된 구결이다. 구결자는 대체로 정자로 쓰였는데 초서체로 흘려 쓰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의 한문석독 자료이다.

2)는 2행 미만의 적은 양이지만 연대가 확실하고 표기법이 균여의 향가와 통하는 석독구결이다.

3)~7)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독구결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11세기 말엽에서 13세기 중엽까지의 자료로 각 자료마다 그 언어가 변천한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 석독구결들의 독법은 다음과 같다.

< 도 1 ><도1>의 오른쪽은 구역인왕경 상권의 제2장의 앞쪽 2행이다. 왼쪽은 그 가운데서 ‘復有他方不可量衆’의 한문구에 현토된 것을 확대한 것이다. 이 석독구결들은 한문 행의 좌우에 토를 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독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측에 토를 단 ‘復’를 토 ‘’과 함께 읽는다. 2번째도 우측에 토를 단 ‘他方’을 토 ‘’과 함께 읽는다. 3번째도 우측에 토를 단 ‘量󰑥’을 읽는다. 이 ‘量󰑥’의 끝에는 점이 있다. 이것이 역독점(逆讀点)이니 위로 역행해 올라가서 읽으라는 부호이다.위로 역행을 하면 좌측에 토를 단 구성소를 읽는다. 그리하여 4번째로 ‘可󰑞’을 읽는다. ‘可󰑞’의 끝에 또 역독점이 있으므로 다시 위로 올라가 좌측에 토를 단 ‘不󰑛’을 읽는다. 이 구성소에는 역독점이 없으므로 아래로 내려와 우측에 토(역독점)를 단 ‘衆’을 읽는다. ‘衆’에 역독점이 또 있으므로 다시 위로 올라가 이제까지 읽지 않은 좌측에 토를 단 ‘有󰑔’를 읽는다.

이와 같이 읽으면 완전히 우리말의 문장이 되는데, 그것을 읽은 순서대로 배열하면 다음 a)와 같다.

a. 復 他方 量󰑥 可󰑞 不󰑛 衆 有󰑔

b. 復爲隱 他方叱 量乎音 可叱爲隱 不知是飛叱 衆 有叱在彌

a)는 한문을 석독한 차례대로 옮겨 적은 것이고, b)는 a)에 쓰인 구결자를 차자(한자)의 정자로 바꾼 것이다. 이 b)는 향찰과 같은 것이다. b)를 보면 어절의 앞 부분은 한문의 구성소인 표의자이고, 뒤의 부분은 토를 표기한 차자인 표음자임을 알 수 있다. 이 ‘표의자 + 표음자’의 구조가 향찰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일례로 헌화가(獻花歌)의 한 구절을 보기로 한다.

紫布 岩乎 过希 執音 乎 手 母牛 放教遣

ᄃᆞᆯ뵈 바호 ᄀᆞᆺ의 잡ᄋᆞᆷ 혼 손 암쇼 놓이기ᄉᆞ고

解釋;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자주색이 된 바위 가에서,

(당신이 너무나 아름다워)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이 노래의 표기에서 어절의 앞부분은 표의자이고, 뒤의 밑줄 친 부분은 석독구결의 토와 같은 표음자들이다. 이는 석독구결의 표기구조와 향가의 표기구조가 같은 원리에 의하여 기록된 것임을 말한다. 즉 구결의 학습에서 익힌 표기법을 향가를 표기할 때 응용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구결자는 신라시대에는 차자(한자)의 정자체가 주로 쓰였지만,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서는 약체자(생획자)가 주로 쓰였다. 구결자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고, 문헌자료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화엄경소』 이후 『유가사지론』까지 쓰인 구결자를 보면 한 문헌 자료에 55자 내외가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이들 문헌에 사용된 구결자를 모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只/ㄱ, 기 /艮/ᄀᆞ /去/거 */在/겨 /古/고

/果/과 */彌/금 */中/긔 */這/ᄀᆞᆺ /隱/ㄴ

/那/나 /奴/노 */臥/누 /尼/니 */飛

*/斤/ᄂᆞᆯ */之/다 /丁/뎌 */彼/뎌 /刀/도

*/邑/도로 /斗/두 /知/디 /支/디 /止/디

,/入/ᄃᆞ */冬/ᄃᆞᆯ */矣/ᄃᆡ /乙/ㄹ /?/ㅭ

/羅/라 */以/로 ,/利/리 /令/리 /音/ㅁ

/?/마 /彌/며 /邑/ㅂ */火/ᄇᆞ /叱/ㅅ

/沙/사 ,/三/삼 */立/셔 /示/시 */白/ᄉᆞᆲ

/賜/ᄉᆞ */良/아 ,/亦/여 */是/이 󰑮/弋/익

/印/인 */之/ᄋᆡ,의 */第/자히 /齊/졔 /下/하

,/乎/호,오 /兮/히 */爲/ᄒᆞ */令/ᄒᆞ이  

이 구결자들은 초서체에서 온 것도 있고, 해서체에서 온 것도 있다. 획이 단순한 차자는 그 원글자대로 사용하지만, 획이 많은 구결자는 정자의 앞이나 뒤의 획을 따서 사용한다.

‘/거’는 초서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ᄉᆞ’는 사(賜)자의 초서체에서 뒤의 획을 딴 것이다. ‘/在’는 해서체의 앞 획을 딴 것이고, ‘/古’는 해서체의 뒤를 딴 것이다. 구결자 가운데는 오랜 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그 정자(正字)를 잃어버린 것이 있다. 자와 자가 그것이다. 과 는 한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어서 독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구결자는 후대로 가면서 없어진 것도 있고, 다른 차자로 교체된 것도 있다. 는 羅자의 약체자 의 뒤를 딴 로 쓰이다가, 15세기 이후에는 단점(·)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석독구결에서는 훈차자가 많이 사용되는 편이지만, 순독구결에서는 음차자로 바뀌어 가는 경향을 보여 준다. ‘/아’는 良자의 훈을 빌린 것인데, 15세기에 오면 厓의 약체자 나 於의 약체자 로 바뀌는 것이 그것이다. 대체로 약체자는 개인의 메모나 편의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므로 공적인 문서나 판본으로 인쇄를 하면 정자로 고쳐진다. 이는 구결자가 원칙적으로 그 차자의 정자에 연계되어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점토석독구결(点吐釋讀口訣)은 한자를 사각형으로 보고, 그 4변의 안쪽과 바깥쪽에 점토를 기입하여 토를 나타낸다. 안쪽을 3등분하면 9위치, 바깥쪽도 3등분하면 12위치, 여기에 사각형의 4귀퉁이의 4위치를 합하면 모두 25위치가 되는데, 이 위치에 점토(点吐) 부호를 써넣어 석독을 표시한 것이다.

점토는 점(點)과 선(線)을 기본으로 하고, 단점(單点) 둘을 합친 쌍점, 점과 선을 조합하여 나타내는데 이 부호들의 방향도 변별요소로 삼아서 표시한다. 다음의 <도 2>가 점토부호 25종을 나타낸 것이다.

<도 2>

이 25종의 부호들을 한자의 25위치에 써넣으면, 모두 625종의 토를 써넣을 수가 있다. 하나의 부호가 25위치를 채운 것을 그림으로 표시한 것을 점도(点圖)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25위치를 다 채운 점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점토석독구결의 자료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5권(11세기 전반기), 『주본화엄경(周本華嚴經)』6권(12세기경), 『법화경(法華經)』1권(11世紀頃), 『진본화엄경(晉本華嚴經)』1권(10세기경),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1권(13세기) 등 5종 14권이 발굴되어 있다.

이들은 거의 각필(角筆)로 기입되어 있다. 각필이란 단단한 나무나 상아(象牙)와 같은 것을 연필과 같이 뾰죽하게 깎아서 만든 필기도구이다. 이를 종이나 나무 같은 것에 누르면 자국이 생기는데, 이 자국으로 글씨나 그림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붓보다는 귀중한 경전(經典)을 더럽히지 않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고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중·일(韓中日) 삼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재 전하는 점토구결은 거의가 각필로 기입된 것이지만, 먹으로 기입한 것도 있다. 또한 점토석독구결은 점토만으로 석독(釋讀)을 표시하고 자토(字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합부금광명경』권3의 석독구결은 한 텍스트 안에 자토와 점토를 함께 사용하였는데, 양자(兩者)는 각기 독자적인 체계로 사용되어 혼용되지 않았다.

자토와 점토를 혼용한 구결은 후대의 자료인 수덕사 소장의 『법화경』권7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개인적인 연구를 위한 일종의 메모와 같은 것이어서 구결 전체를 체계적으로 기입한 것은 아니다.

< 도 3 >점토석독구결의 토는 구(句)의 끝 글자에 몰아서 붙이고 있다. 자토석독구결에서는 우리말로 석독되는 순서대로 한문의 각 구성소에 토를 달았으나, 점토석독구결에서는 한문의 어순과 국어의 어순이 일치할 때는 이 원칙으로 토를 달고, 어순이 다를 때는 역독(逆讀)의 표시가 없이 구의 끝 글자에 토를 몰아서 달았다. 간혹 선이나 부호를 이용하여 역독의 표시를 한 것이 있으나, 수의적(隨意的)으로 사용하여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문헌에 따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 독법을 <도3>에 제시한 자료를 가지고 설명하기로 한다. 이는 『진본화엄경』권20의 제2장 7행의 한 구절을 보인 것이다. 오른 쪽의 한문구 ‘영일체중생실능제멸제장알업(令一切衆生悉能除滅諸障閼業)’이 그것인데, 그 각필 점토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왼쪽에 점토가 달린 ‘생(生)’ ‘능(能)’, ‘업(業)’자를 뽑아 제시한 것이다.

‘生’의 좌변 중하단 외측의 단점은 대격조사 ‘/ㄹ’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일체중생’이 이 문맥에서 목적어로 쓰임을 보이는 것으로 이 구성소는 한문의 어순과 국어의 어순이 같은 경우이다.

‘能’의 우변 상단내측의 단점 토는 ‘/디’를 나타내는데, 이는 ‘能’이 부사어 ‘能’로 석독되고, 그 어순도 한국어의 어순과 같음을 나타낸다.

‘業’에 3개의 점토가 몰려 있다. 그 좌변 중하단 외측의 단점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대격조사 ‘/ㄹ’을 나타내는 토이다. 우변 중단외측의 역사선의 아래에 점을 찍어서 감탄부호와 같이 생긴 부호는 사역형 ‘/ᄒᆞ이’를 나타내는 토로, 본래 한문의 ‘령(令)’의 기능에 대응하는 것이지만, 한국어의 문법에 따라 ‘령’을 읽지 않고, 이 구의 서술어 ‘除滅’에 붙이어 읽는 것이다. 하변 좌단외측의 단점토는 ‘/며'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구와 구를 잇는 접속어미이다. 이 구절을 자토로 적고 당시의 국어를 고려하면서 한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字吐表記; [令]一切 衆生 悉 能 諸 障碍業 除滅 ※[ ]는 不讀字의 표시.

한글表記; 一切 衆生을 다 能디 모ᄃᆞᆫ 障碍業을 除滅ᄒᆞ이며

점토석독구결의 점토는 아직 해독되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러나 단점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가장 높은 빈도를 보여 준다. 쌍점, 선, 복합부호들도 단점이 나타내는 글자나 토에서 확장되어 나간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본화엄경』에서는 한자의 좌변 중하단외측의 단점은 ‘/ㄹ’을 나타내는데, 이 위치에 쓰인 ‘‥’는 ‘/ᄃᆞᆯ’을, ‘∶’는 ‘󰑥/호릴’을, ‘ㆎ’는 ‘/호ᇙᄃᆞᆯ’을 나타내어 모두 대격의 ‘/ㄹ’을 포함하는 토를 나타내고 있다.

한자를 사각형으로 보고 점토가 나타내는 각 위치를 표시하면 점도(点圖)가 되는데, 단점의 점도를 구결자와 함께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본화엄경의 점도> <유가사지론의 점도>

이 점도를 보면 『주본화엄경』과 『유가사지론』의 점도가 서로 대립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토석독구결에서는 이러한 종파적인 차이가 보이지 않는데 점토석독구결에서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앞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현황

한문을 한문의 어순대로 음독해 가면서 그 구두에 해당하는 곳에 토를 넣어 읽는 것이 순독구결(順讀口訣)이다. 1970년대에 석독구결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이 구결만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구결이라 하면 이를 가리켜 왔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 이전에는 석독구결이 주로 쓰여 왔음이 확인되면서 이를 순독구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순독구결(順讀口訣)은 한문을 독송하면서 그 내용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독법이어서 한문을 이해하는 수준이 높아지면서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순독구결은 한문이 널리 보급되고 그 구사능력이 향상된 12세기경에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발굴된 고려시대말에서 15세기에 훈민정음이 창제되기까지의 순독구결 자료는 한글자료 이전의 우리말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현재 15종 이상의 자료들이 발굴되어 있다. 이 고려시대의 순독구결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내포문(內包文)에 해당하는 토를 구절말의 한자에 몰아서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곡본 『능엄경』권2의 ‘通辯 萬物󰑛/이 無是見者/인ᄃᆞᆯ호니라’에서 문말의 토 ‘/인ᄃᆞᆯ’은 이 문구의 내포문인 ‘萬物 無是見者’에 붙는 것이고, ‘/호니라’는 이 문구의 서술어인 ‘通辯’에 붙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구를 한국어의 어순으로 풀어서 표시하면 ‘萬物󰑛 無是見者 通辯’와 같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내포문의 토를 살려서 현토하는 예는 15세기까지 자주 나타나다가 후대에는 문장의 서술어에 해당하는 토만 다는 것으로 단순화되었다. 이 순독구결의 초기 자료는 석독구결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의 순독구결을 보자.

汝眼 旣知 身合非覺者 旣在虛空 自非汝體也

※ /은 /커든 /란 /ᄒᆞ란대 /ᄋᆡᆺ다

여기에 쓰인 ‘者’은 한문의 ‘者’가 주제를 나타낼 때 음독하지 않고 ‘란’으로 훈독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의 토인 ‘/란’을 둘로 나누어 ‘/라’는 ‘者’자의 앞에, ‘/ㄴ’은 그 뒤에 붙여 ‘者’를 음독하지 않고, '/란'으로 훈독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용법은 ‘則/란’, ‘則/온’, ‘-故/-ㄴᄃᆞ로’와 같은 접속어와 ‘之/의, ㅅ'과 같은 조사가 있다. 이는 14세기 초의 순독구결 자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15세기에 들어오면 거의 사라진다. 아마도 13세기 이전의 순독구결에선 석독의 범위가 이보다 더 넓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구결을 음독구결(音讀口訣)이라고도 하는데, 순독구결에도 훈독(訓讀)이 있고 석독구결에도 음독(音讀)하는 한문구가 많으므로 이와 혼동을 피하는 데는 적당하지 않은 용어이다.

순독구결이 보급되면서 석독구결은 차츰 쇠퇴하고, 이 구결만이 현재에까지 사용되게 되었다. 한글이 창제되면서 15세기의 불경언해에서는 구결자 대신 한글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구결자가 사용하기에 편하므로 손으로 기입하는 구결에서는 구결자들이 주로 쓰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에는 고려말기부터 시작된 송대(宋代) 성리학의 이념을 유가경전(儒家經典)에 반영하여 순독구결을 짓는 것이 큰 사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몽주(鄭夢周)의 주역구결(周易口訣)이 있다고 하였고, 권근(權近)이 시(詩), 서(書), 역(易)의 구결을 지었다고도 하였다. 세조는 친히 지은 어정주역구결(御定周易口訣)과 권근의 주역구결을 가지고, 신하들을 좌우로 나누어 그 타당성을 3년 동안 논변(論辯)하도록 한 바 있다.

이 사업은 주자학의 주석서들이 들어와 율곡(栗谷)과 퇴계(退溪)의 경서구결이 정해지고, 선조 때에 교정청본 경서언해(校正廳本 經書諺解)의 간행이 완료되면서 일단락을 짓게 된다. 그러나 율곡과 퇴계의 구결에도 차이가 있어 후대에 이기론(理氣論)의 논쟁이 지속되었다. 15세기의 불경언해들도 먼저 구결을 짓고, 이에 준하여 언해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유가의 경전과 불경에 토를 다는 사업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후기에는 구결이 보급되어 한문본 『구운몽(九雲夢)』이나 『삼국지(三國志)』와 같은 소설에도 토를 달아 읽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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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訣의 硏究를 위하여」(安秉禧, 『성균관대학교 근대교육80주년기념 동양학학술회의논문집』, 1975)
집필자
남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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