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장(落張) 1매이다. 쇼소원은 북창(北倉)ㆍ중창(中倉)ㆍ남창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창에서 나온 신라 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충주) 부근의 촌락문서(村落文書)는 일찍부터 잘 알려진 장적(帳籍)이다.
이것을 쇼소원 소장의 ‘제1신라문서’라 하고, 새로 알려진 것을 ‘제2신라문서’라 하여 구분한다. 현재 신라시대의 행정문서는 이 둘뿐이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제2신라문서’는 ‘제이신라장적(第二新羅帳籍)’ 혹은 ‘신라출납장(新羅出納帳)’, ‘신라공물문서(新羅貢物文書) 단편(斷片)’, ‘신라녹봉문서(新羅祿俸文書) 단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한 장의 문서는 사파리가반(佐波理加盤) 제15호 4중완(重鋺)의 제4호완(號鋺) 속에 들어 있었다. 종이는 황갈색의 두터운 닥종이〔楮紙〕인데, 크기는 세로 29㎝, 가로는 위쪽이 13.5㎝이다. 앞면에는 가로ㆍ세로의 계선(界線)이 있으나 뒷면에는 없다. 세로의 계선은 7줄인데 착묵상(着墨上)의 농담(濃淡)이 있다. 가로로 된 아래위 계선 사이의 길이는 24.6㎝, 난외의 여백은 상하 각 2.2㎝이다.
문서의 앞면에는 녹청(綠靑) 같은 것이 묻어 있고, 뒷면에도 갈색의 풀자국 같은 것이 세로로 보인다. 사파리가반은 유제품(鍮製品)의 바리 종류로 신라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제품과 함께 이 문서가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신라문서는 낱장인 데다가 기재된 분량도 많지 않으나, 자형의 판독을 비롯하여 지명 표기 여부와 그 해독 등 몇 가지 점에서 논란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두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전면의 이두 표기로 보이는 부분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이 문서가 쓰여진 연대와 지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문서 가운데 보천촌(寶川村)이라는 촌 이름이 나오는데,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에 있었다는 파천부곡(巴川部曲)일 가능성이 높다. 제1신라문서가 충청북도 청주지역의 촌락문서이므로, 두 문서는 서로 같은 지역의 행정 문서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문서는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신라문서가 755년(경덕왕 14)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문서도 역시 8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측된다. 문자 기록은 앞면에 4행, 뒷면에 4행이 묵서(墨書)로 기입되어 있다.
앞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才 接五
馬於內上キ一具上仕之キ尾者上仕而汚去如
3ㆍ4행은 비었음.
巴川村正月一日上米四斗一刀大豆二斗四刀二月日上米
四斗一刀大豆二斗四刀三月米四斗
제1행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제2행은 キ자를 ‘等’자의 이체자로 보면 ‘馬於內(말의 裝具인 듯) 상등품(上等品) 한 벌은 위에 바쳤다. 하등품(等尾)은 위에 바치기는 하였으나 퇴거(退去)되었다.’ 정도로 해석된다. 이것은 물품을 지출한 기록이다.
제5ㆍ6행은 파천촌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이는 쌀과 콩에 대한 수납 기록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 문서는 행정 관청의 출납 대장에서 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뒷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米十斗失受……
永忽知柒受丑二石上米十五斗七刀 六互壹受失二石
上米十七斗 丑一石十斗 上米十三斗 契米山壹受丑二石
上米一石一斗
이 내용도 곡물의 출납에 관한 기록인 듯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앞면의 제2행은 이두문(吏讀文)인데 그 가운데는 토(吐)가 쓰였다. ‘之’ㆍ‘者’ㆍ‘如’가 그것이다. ‘之’는 국어의 서술 종결 어미 ‘-다’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10세기)까지 쓰였다. ‘者’는 이두로 보아 국어의 보조 조사 ‘은ㆍ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라의 이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如’는 之와 같은 서술 종결 어미 ‘―다’를 표기한 훈가자(訓假字)로, 신라화엄사경조성기(新羅華嚴寫經造成記, 755)와 제1신라문서에서 이미 사용되기 시작하여 근대의 이두에까지 널리 사용된 것이다. 이를 보아도 이 문서가 신라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오(汚)’의 의미에 대해서는 ‘목록에서 지웠다’라는 뜻에 가깝다고 보는 반면, ‘더럽히다’로 보기도 하였다.
되〔升〕를 나타내는 ‘刀’는 이 문서의 것이 최고(最古)이다.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이 차자(借字)의 쓰임이 확인되었지만, 신라시대의 보통 명사 표기에서 이러한 음가자(音假字)가 쓰인 것은 이 시대의 표기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를 통해 ‘斗’도 ‘말’로 훈독(訓讀)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뒷면은 먼저 문자의 판독에서 ‘柒’ㆍ‘壹’이 불분명하다. 이를 ‘乃末’과 ‘大舍’로 판독한 견해가 있으나 자형상 그렇게 보기 어렵다. ‘丑’ㆍ‘失’의 뜻도 미상이다. 이 계통의 자료가 더 나와야 구체적으로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해독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다. 우선 ‘接五’에 대해서 ‘接’을 ‘受’와 같은 뜻으로 보아 ‘접수한 차례로 제오(第五)’로 보거나 ‘장(帳)의 연접(連接)한 차례로 제오장(第五張)’, 혹은 물품이 보관된 창고의 일련번호로 보기도 한다. 마어내(馬於內)는 ‘마려(馬膐)’나 ‘마부(馬腐=馬腑)’로 읽을 가능성이 있음에서 이를 말의 가슴부분 고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거나, ‘마ᄂᆞᆯ나’라는 지명(地名)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오거여(汚去如)의 ‘去’는 이두라기보다는 한문 문법적 요소로서 ‘-了’ 즉, 완료형 종결 어미로 보고 있다.
또한 ‘失’과 ‘丑’에 대하여 한국 한자음의 관점에서 각각 ‘實’과 ‘楸’의 가차표기(假借表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새로운 주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キ’에 대해서는 안압지(雁鴨池) 출토의 207번 목간(木簡)에서의 쓰임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尾’로 나타난 공물(貢物)의 분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豹’=‘土豹’ 즉, 스라소니(제1후보) 또는 ‘狐’ 즉, 여우(제2 후보)를 의미하는 글자일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현재 신라시대의 행정문서는 ‘제1신라문서’와 이것뿐이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신라 당시의 이두를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의 하나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끌어왔다. 한편으로는 신라 속자(俗字)의 보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이한 자형(字形)ㆍ자체(字體)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