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

삼국사기 / 김후직의 상진평왕서
삼국사기 / 김후직의 상진평왕서
한문학
개념
한자로 이루어진 문어체의 문장.
내용 요약

한문은 한자로 이루어진 문어체의 문장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문장’ 또는 한시에 대응하는 산문으로서의 한문이란 뜻으로 쓰여 왔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들은 한자어로 된 문장을 모두 한문이라 불러왔다. 한문은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소통이 『문선』에서 38종으로 분류하여 체계화를 시도했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비문이나 행정·외교문서 등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후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다. 최치원이 『계원필경』에서 체계화작업을 시도한 이후 조선시대 왕명으로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에서는 55갈래로 정리되었다.

정의
한자로 이루어진 문어체의 문장.
개설

중국에서 한문이라 함은 당시(唐詩)나 송사(宋詞) 혹은 원곡(元曲), 명청소설(明淸小說) 등과 대비되어, 한(漢)나라의 문(文)이라는 뜻으로 쓰여왔다.

그러나 주변국들, 특히 우리나라나 일본은 이러한 구별을 하지 않고 한자어로 된 문장을 모두 한문이라 써왔던 것이다. 한편, 보다 범위를 국한시켜 한시(漢詩)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한문이 쓰이기도 한다. 이때는 산문(散文)으로서 운문(韻文)과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갈래의 성립

한문의 갈래는 위(魏)나라 문제(文帝)인 조비(曺丕)의 저서 『전론(典論)』의 논문편(論文篇)과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서 비롯되었다. 조비는 한문을 주의(奏議) · 서론(書論) · 명뢰(銘誄) · 시부(詩賦)의 네 갈래로 분류하였다. 육기는 시 · 부 · 비(碑) · 뇌(誄) · 명(銘) · 잠(箴) · 송(頌) · 논(論) · 주(奏) · 설(說)의 열 갈래로 분류한 바 있다.

이어 지우(摯虞)의 『문장유별지론(文章流別志論)』을 거쳐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에 이르러 한문장의 갈래는 그 완성을 보게 된다. 『문심조룡』은 21종으로 체계화하였고, 『문선』은 38종으로 안배하여 모든 한문장을 조리 있게 배열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후대에는 문학적 조건에 맞추어 다소간 증감이 가해졌다.

그 결과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갈래의 수효는 130여 개가 넘고 있다. 이를 비슷한 것끼리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논변류(論辨類): 논(論) · 변(辨) · 설(說) · 의(議) · 해(解) · 난(難) · 석(釋) · 원(原) · 유(喩) · 대문(對問) · 사론(史論).

② 주소류(奏疏類): 주(奏) · 소(疏) · 상소(上疏) · 장(章) · 표(表) · 상표(上表) · 상서(上書) · 의(議) · 차(箚) · 차자(箚子) · 방자(牓子) · 책(策) · 대책(對策) · 노포(露布) · 탄사(彈事) · 탄주(彈奏) · 주기(奏記).

③ 조령류(詔令類): 조(詔) · 영(令) · 고(誥) · 서(誓) · 제(制) · 명(命) · 칙(勅) · 유(諭) · 책(冊) · 교(敎) · 격(檄) · 새서(璽書) · 어찰(御札) · 사문(赦文).

④ 사독류(私牘類): 서(書) · 독(牘) · 간(簡) · 찰(札) · 첩(帖) · 계(啓) · 이문(移文) · 격(檄).

⑤ 서발류(序跋類): 서(序) · 서(敍) · 후서(後敍) · 서록(敍錄) · 발(跋) · 서발(書跋) · 제(題) · 제사(題辭) · 제후(題後) · 서후(書後) · 인(引) · 소서(小序) · 예언(例言).

⑥ 증서류(贈序類): 송서(送序) · 증서(贈序) · 인(引) · 수서(壽序).

⑦ 전장류(傳狀類): 전(傳) · 사전(史傳) · 가전(家傳) · 별전(別傳) · 외전(外傳) · 소전(小傳) · 행장(行狀) · 사략(事略) · 내전(內傳) · 보전(補傳) · 세가(世家) · 실록(實錄).

⑧ 잡기류(雜記類): 기(記) · 기사(紀事) · 유기(遊記) · 화기(畫記) · 지(志) · 지술(誌述).

⑨ 송찬류(頌贊類): 송(頌) · 찬(贊) · 부명(符命) · 치어(致語).

⑩ 애제류(哀祭類): 뇌(誄) · 축(祝) · 석전문(釋奠文) · 상량문(上樑文) · 기(祈) · 사(謝) · 탄식문(歎息文) · 재사(齋詞) · 원문(願文) · 초사(醮辭) · 관사(冠辭) · 새문(賽文) · 찬향문(贊響文) · 맹문(盟文) · 서문(誓文) · 청사(靑詞).

⑪ 비지류(碑誌類): 비문(碑文) · 묘비(墓碑) · 신도비(神道碑) · 신도표(神道表) · 묘표(墓表) · 묘지(墓誌) · 영표(靈表) · 묘갈(墓碣) · 광지(壙誌) · 천표(阡表).

⑫ 잠명류(箴銘類): 잠(箴) · 명(銘) · 계(戒) · 훈(訓) · 규(規) · 영(令) · 고(誥).

⑬ 시부류(詩賦類): 시 · 부 · 사(詞) · 사(辭) · 소(騷) · 연주(連珠) · 게(偈).

⑭ 소설류(小說類) 등이다.

갈래의 성격

(1) 논변류 : 의론문(議論文)의 형식이다.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사상을 분석하여 시비를 따지고 도리를 가리는 글이다. 본래의 논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론문과는 약간 성질을 달리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을 ‘경(經)’이라 하고, 경의 원리를 조술(祖述)한 것을 ‘논(論)’이라 한 것이다. 공자의 함축성 있는 말을 그의 제자들이 추상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경서(經書)의 적요(摘要)라 하여 경의를 표하고 ‘논어’라 명명한 데서 논이 유래하였다.

특히, 문답체로 된 것을 ‘설론(設論)’ 또는 ‘대문(對問)’이라 한다. 그러나 논문의 명칭이 처음 쓰여진 것은 순자의 「천론(天論)」 · 「정론(正論)」 · 「예론(禮論)」 · 「악론(樂論)」 등이다.

(2) 주소류 : 신하가 왕에게 올린 글이다. 형식은 의론문이다. 육조(六朝) 이후에는 변문(騈文)으로 썼다. 『문심조룡』을 참고해보면, 옛날 요순(堯舜)의 신하들이 정치상황을 왕에게 구두로 주상(奏上)하였다가, 뒤에는 차츰 글로 올렸다 한다. 그러나 구두이건 글이건 주상하는 일체의 것을 처음에는 상서라 하였다.

진한(秦漢)의 관리들이 상서 대신 ‘주(奏)’라고 하였다. 다시 예(禮)의 질서가 제정된 한대(漢代)에 와서 네 종류로 세분되었다. 첫째 ‘장’이라 하여 군은(君恩)에 감사를 표할 때 쓰였고, 둘째 ‘주’라 하여 죄과를 고할 때 쓰였다.

셋째 ‘표’라 하여 요청을 서술할 경우 쓰였고, 넷째 ‘의’라 하여 이의를 신청할 때 쓰였던 것이다. 후한(後漢) 때에는 인재등용에 반드시 장과 주의 시험이 부과되었기에 걸작이 많았다. 주소문은 명석 · 신의 · 독실 · 지성을 기본으로 하고 분석과 통찰력을 제일로 한 글이다.

(3) 조령류 : 주소류가 신하가 군주에게 올리는 글인 데 비하여 조령류는 군주가 신하나 백성에게 내려주는 글이다. 처음에는 ‘명(命)’이라 하였다가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에서는 고(誥)와 서(誓)를 더 첨가하였다.

명은 관위(官位)의 수여나 제후의 임명 등에 사용하였고, 서는 병정들에게 내린 훈계에, 고는 정치에 대한 진술에 각각 사용하였다. 한대에는 명을 네 종류로 나누었으니 책서(策書) · 제서(制書) · 조서(詔書) · 계칙(戒勅) 등이 그것이다.

책서는 제왕(諸王)의 임명에, 제서는 주1의 시행에, 조서는 여러 관료의 포고에, 계칙은 지방기관의 주2 각각 사용하였다. 한대 이후에는 왕이나 대신이 내린 것을 교(敎), 왕후나 세자가 내린 것을 영(令)이라 하였다.

격(檄)은 전쟁(戰爭) 때 발동하는 포고문이다. 조령문은 가장 삼엄한 것이 특징이다. 전한 · 후한 때에는 조령을 상서(尙書)에서 담당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사기(史記)에 올려졌다.

(4) 사독류 : 사적인 문서로 의례적인 문구를 넣어 정중하게 뜻을 전달하는 문장이다. 『문심조룡』에 의하면 기록하는 일을 서(書)라 하였다. 처음에는 시대적인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성현의 말을 모은 것을 『상서(尙書)』라 하여 ‘서’자를 쓴 것은 그러한 점을 시사한 것이다.

춘추시대에는 대외교섭이 빈번하여 서간을 지참한 사신이 많았다. 『좌전(左傳)』에는 그러한 사실이 많이 보인다. 한나라 이후에는 더욱 개성 있는 서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선』에서 그 같은 글들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서독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둘로 나눈다. 사적인 것은 이른바 편지이다.

(5) 서발류 : 자신의 저술 또는 타인의 저술에 대한 경위 · 해석 · 평 · 성격 등을 서술하여 책의 앞 또는 뒤에 붙이는 글이다. 의론문으로 보아도 좋으나 기술을 겸한 문장이다. 『서경』이나 『시경』에도 각 편마다 서(序)가 있으니 그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서(敍)라고도 한다.

한대 이전에는 저술의 목록을 뒤에다 붙였고 다시 그 목록 뒤에다 서를 놓았다. 그러므로 후서(後序) 또는 후서(後敍)라 불렀다. 저자 스스로가 쓴 것은 자서(自序)라 한다. 육조 이후에는 서를 저서의 앞에다 붙이고 발(跋)은 후미에다 붙였다. 이러한 서발류는 비평자료로서 귀중한 값어치가 있다.

(6) 증서류 : 증서(贈序)라 이름 붙여진 것은 당나라 때에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전별(餞別) 석상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 시를 책으로 꾸며서 서문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발(序跋)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나, 뒤에는 서문만을 지어서 보내던 습관이 생기자 증서류는 하나의 독립된 갈래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송대에 이르러 송별뿐만 아니라 자호(字號) 등을 내려줄 때에도 교훈의 뜻을 함축하여 증서문을 만들어 썼다. 또 명나라에 와서는 장수를 축하하는 일에도 이 갈래의 글을 썼던 것이다. 이것이 마침내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유행하게 된 것이다.

(7) 전장류 : 모모전(某某傳) · 모모행장(某某行狀)의 형식이다. 한나라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저술할 때에 그 속에 「열전(列傳)」 70권을 삽입함으로써 열전을 정사(正史)의 일부로 파악하게 되었다. 열전은 한 왕조를 통해서 역사상 특이한 인물 또는 역사기술상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는 인물들의 전기를 기술한 것이다.

또, 정사 이외에 「열선전(列仙傳)」 · 「열녀전(烈女傳)」 · 「고사전(高士傳)」 · 「고승전(高僧傳)」 등과 같이 동일한 성질의 것끼리 모아놓은 것도 있다. 당(唐) 이후에는 정사에 기록된 것을 본전(本傳)이라 하고, 별도로 꾸며놓은 전기를 별전(別傳) 또는 소전(小傳)이라 하였으며, 그 자손이 꾸민 것을 가전(家傳)이라 한다.

행장은 전기에 비해서 비교적 이력이 상세하게 적혀 있으며, 자손이나 문인이 쓰는 것이 보통이다. 전장류는 서사문학(敍事文學)의 주류가 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8) 잡기류: 기(記)는 기사문이다. 어떤 사건의 시말을 기록한 것으로 비지류와 닮은 점이 있다. 증국번(曾國藩)은 기를 기재(記載)라 하여 넷으로 나누었다. 전지(傳誌) · 서지(敍誌) · 전지(典誌) · 잡기(雜記)가 그것이다.

전지는 비지나 전장(傳狀)에 해당된다. 서지는 순수한 사실과 사건을 기술하며, 전지는 국가의 제도를 기술한 것으로 대부분 정사에 기재된 것이다. 이것들을 제외한 것들이 잡기이다. 잡지(雜志) 또는 잡지(雜識)라고도 한다. 비교적 형식이 자유스럽고 제재도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궁실이나 제각(帝閣)의 수조(修造), 산수의 유력(遊歷), 일기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일록(日錄), 심지어는 미물에 대한 감상을 표현한 것도 있다. 이른바 현대 개념의 수필이나 기행문과도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문학적 향기가 짙게 깔려 있는 글이다.

(9) 송찬류 : 송(頌)은 공적을 기리는 것이다. 『시경』의 「주송(周頌)」 · 「상송(商頌)」 · 「노송(魯頌)」 등은 선조의 공업을 담고 있다. 찬(贊)은 찬(讚)과 같다. 역시 기리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송은 흔히 돌에 새겨졌다. 『사기』진본기(秦本紀)의 「삭석송공덕(削石頌功德)」이 그 예이다.

따라서 이들을 비지류에 넣기도 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에는 대체로 돌에 새기는 일이 적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송을 과거문으로 쓰기도 하여 문장법이 발달되기도 하였다. 찬은 원래 사가(史家) 이외에는 잘 짓지 않았으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차 문인 사이에 유행하게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즐겨 짓게 되었다.

(10) 애제류 : 『주서(周書)』 시법(諡法)에는 젊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애(哀)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애사(哀辭), 추도문(追悼文)이 나타나거니와 이 경우도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만 쓰였던 것이다.

애사 외에 조문(弔文)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대개 높은 지위에 있다가 불운하게 죽은 사람, 높은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 재능은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죽은 자 등을 추상(追想)하여 영령을 위로하는 글이다.

그 밖에 뇌문(誄文)이라는 것은 생시의 덕행을 늘어놓아 상찬하는 문장이다. 곧 죽은 자의 언행을 선택, 기록하고 전기의 본질을 따다 송(頌)의 수사법을 가미하여 애도의 정을 서술한 것이다.

(11) 비지류 : 『문심조룡』에 의하면, 옛날 제왕들은 그들 나름대로 말을 기록하여 천지에 제를 올리고 그곳에 암석으로 성가퀴를 만들어 비(碑)라 하였다. 또, 죽은 사람의 영을 모신 영실에는 동서 기둥 옆에 비를 세웠다 하는데, 여기에는 산 동물을 묶어놓았을 뿐 개인의 사적을 적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차츰 공업(功業)을 기물에 새기는 습관이 발달하자 후대에는 기물 대신에 비가 생기게 된 것이다. 비지(碑誌)가 성황을 이룬 것은 후한시대이다. 그러나 묘지에 수사가 동원되어 문학성을 띠게 되는 것은 남북조시대이다.

비지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원(元)의 왕행(王行)이 밝힌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휘(諱) · 자(字) · 성씨 · 향읍(鄕邑:본관) · 족출(族出) · 행치(行治) · 이력 · 졸일(卒日) · 수년(壽年) · 처(妻) · 자(子) · 장일(葬日) · 묘지(墓地).

(12) 잠명류 : 잠이라는 글자는 침(鍼 · 針)이라는 글자와 같은 것으로 병을 다스릴 때 쓰는 침이나, 바느질할 때 쓰는 바늘과 같은 것이다. 즉, 자극을 주어서 마음이나 행동의 계(戒)로 삼도록 쓰여진 글이다. 이 갈래는 초기부터 발달된 것이었다.

명은 원래 기물(器物)에 많이 새겨졌다. 특히, 일상적인 생활도구가 아닌 보기(寶器)에 종종 새겨졌다. 보기란 어떤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명문(銘文)은 그 사건의 기록을 함축시킨 것이다. 그러나 훈계의 뜻을 담은 것은 잠과 같다.

『예기』「대학편」에 인용된 탕(湯)의 「반명(盤銘)」이나 『좌전』에 인용된 정고보(正考父)의 「정명(鼎銘)」 등이 좋은 예가 된다. 후대에 이들이 문집 속에 정리되어 문장의 한 갈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밖에 시부류와 소설류는 현대의 개념과 비슷하다.

한국 한문의 갈래

우리나라 한문장의 갈래가 어떠한 경로로 성립되었는지 정확히 추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문의 발상지인 중국으로부터 한문관계 서적이 언제부터 우리 나라 독서층에 알려지게 되었는가이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강수(强首)에 관한 기록 중에 그가 『문선』을 배웠다는 언급이 보인다.

이로써 강수 이전에 벌써 『문선』이 이 땅에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8세기경에는 인재등용을 위한 독서삼품과의 필수과목으로 『문선』이 설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경당(扃堂)에서 자제를 교육할 때에 『문선』을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생각하였다. 『문심조룡』은 『문선』에 비하여 전래가 뒤늦은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보령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비문(郎慧和尙碑文)을 보면 경문왕이 낭혜화상에게 『문심조룡』의 내용을 묻는 대목이 있다. 869년(경문왕 9)의 일이다. 이로 볼 때 『문심조룡』의 보급이 실제로 완만했음을 알 수 있다.

『문선』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각각의 특성을 가진 한문의 갈래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학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문선』이 전래되기 이전부터도 무원칙한 글의 제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이는 『문선』이라는 체계적 교과서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중국인들의 작품을 수용하였을 것이므로 부분적인 갈래의 이해는 진행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최치원 이전까지 나타난 한문장의 갈래를 살펴보면, 시간적으로 제일 먼저 확인 가능한 것은 비문이다.

이 비문은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필두로 해서 진흥왕사비(眞興王四碑) 등 금석문으로 확인된 것만도 50개가 넘는다. 비는 큰 사건이나 공적을 기록한 석비(石碑)와 죽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각석(刻石)이 있다. 석비문의 형식은 전기(傳記)에 해당한 서문과 공덕을 기리는 명(銘)이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 벌써 이러한 형식이 지켜졌음을 보게 된다. 사전(史傳)이 다음으로 나타났다. 단독적인 저서로는 남아 있지 않으나 대개 역사서술의 중요성에 입각하여 나온 사서들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이문진(李文眞)이 편찬한 『신집(新集)』, 신라에는 『국사(國史)』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異斯夫) 등의 상소를 보면 감계주의(鑑戒主義)에 바탕한 사관을 피력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경우와 같은 것이었다. 주소류와 조령류가 다음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하가 왕에게 올린 서 · 소 · 표 등이 보이고, 왕이 신하나 국민에게 내린 교서 · 유조(遺詔) 등이 있다.

중국에 보내는 서 · 표 등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예시하면 김후직(金后稷)「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 김양상(金良相)의 「논시정소(論時政疏)」, 강수의 「걸병정고구려표(乞兵征高句麗表)」, 신문왕의 「평적교서(平賊敎書)」, 문무왕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등 20여 편이 있다.

다음은 서(序)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대개 불교문자로 원효(元曉)의 「법경종요서(法經宗要序)」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명(鐘銘)이나 불상명(佛像銘)과 같은 명이 얼마간 보인다. 본래 기물에 새겨 ‘행동의 계(戒)’로 삼았던 경우와는 다르게 소유주나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새겨 발원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몇 편의 오언고시를 제외하고는 잠 · 찬 · 기 등이 보일 뿐이다. 성덕왕의 「백관잠(百官箴)」, 박인범(朴仁範)의 「범일국사영찬(梵日國師影贊)」, 김대문(金大問)「한산기(漢山記)」, 작자 미상의 「상원사종기(上院寺鐘記)」 등이 그 예이다.

한문장의 갈래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문 · 사전 · 서(書) · 소 · 표 · 교서 · 서(序) · 명 · 잠 · 찬 · 기 · 시 등 12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갈래의 성격에서 볼 때에 당시의 문자행위는 문예의식적 차원보다는 실용을 위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용문의 발달은 왕권확립을 지향하던 삼국시대의 정치적 필요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최치원에 오게 되면서 한문장의 갈래가 하나의 틀을 형성하게 된다. 그는 직접 중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던 관계로 그곳의 문학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문집 속에는 다종다양한 한문의 갈래가 정돈되어 나타난다.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17갈래의 산문 351편과 시 60수가 실려 있다. 17종의 갈래를 열거해보면, 표 · 장 · 별지 · 격 · 서 · 위곡(委曲) · 첩사(牒詞) · 재사(齋詞) · 제문 · 기 · 소 · 계 · 비문 · 찬 · 원문(願文) · 전 · 시 등이다.

여기에 나타난 것이 그의 작품의 전부라 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갈래가 체계적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우리나라 한문의 기틀을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최치원의 뒤를 이은 고려의 한문은 선인들이 남긴 문학유산으로 따져볼 때에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 된다.

문집의 이름만 전하는 것으로 40여 종, 그리고 실제 문집이 현전하는 것은 30여 종이다. 현전하는 것 중 비교적 작품과 체재가 온전한 것으로는 이규보(李奎報)『동국이상국집』, 이색(李穡)『목은집(牧隱集)』, 이제현(李齊賢)『익재집(益齋集)』 정도가 있다.

나머지 문집들은 단편적인 작품들을 후손이나 제자들이 모아 간행한 것들이다. 『동국이상국집』은 작품의 수나 갈래적 측면에서 전대의 부진한 모습을 씻어내는 듯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적으로 살펴보면 이 문집에는 25갈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목은집』에는 15갈래가 수록되어 있다. 고려 한문학을 총괄적으로 따져볼 때에 이 시기는 한문학이 정비되고 성숙해 가는 단계에 있었으므로 문장 갈래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보편화되었음을 본다. 고려를 거쳐서 조선에 이르게 되면 우리 나라 한문학은 난숙기를 이룬다.

현재 남아 있는 약 1만 8000여 종에 이르는 주3 중에서 미미한 삼국 · 고려의 유산을 제외하면 모두가 조선시대에 저술된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한문의 갈래를 종합적으로 살피는 데에는 『동문선』만한 것이 없다. 『동문선』의 서에 보면 중국의 『문선』을 본떠서 문장을 가려 뽑은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지 『문선』에서 모든 것을 따왔다는 말은 아니다. 『동문선』에서 취하고 있는 한문의 갈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 · 부 · 오언고시 · 칠언고시 · 오언율시 · 칠언율시 · 오언절구 · 칠언절구 · 조칙(詔勅) · 교서 · 제고(制誥) · 책(冊) · 비답(批答) · 표전(表箋) · 계 · 장 · 노포(露布) · 격서(檄書) · 잠 · 명 · 송 · 찬 · 주의 · 차자 · 문 · 서(書) · 기 · 서(序) · 설 · 논 · 전 · 발 · 치어(致語) · 변 · 대(對) · 지(志) · 원(原) · 첩(牒) · 의(議) · 잡저 · 책제(策題) · 상량문 · 제문 · 축문 · 소 · 도량문(道場文) · 재사(齋詞) · 청사(靑詞) · 애사(哀詞) · 뇌 · 행장 · 비명 · 묘지 등의 모두 55갈래이다.

위에서 보면 문사들이 처음에는 『문선』 위주의 문학에 몰두하여 있다가 점차로 당 · 송대의 문학을 익히고 나아가 좀더 개성적인 창작활동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문선』과 『동문선』의 내용을 비교해가면서 이러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하자.

논변류를 보면 설 · 논 · 대는 양쪽에 다 보인다. 그러나 난(難)은 『동문선』에서 빠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갈래인 듯하다. 그런데 변과 원은 『문선』에는 없고 『동문선』에만 나타난다. 이것은 당 · 송대 이후에 유행한 갈래였기에 『문선』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조령류의 경우에는 조 · 교 · 책 · 격 등은 양쪽에 같이 들어 있다. 그러나 군(軍)은 『문선』에만 비답 · 첩은 『동문선』에만 나타난다. 『문선』에 없는 것들은 역시 당대 이후에 유행한 갈래들이다.

주소류는 표 · 주 · 계 등은 같이 나타나고, 다만 상서 · 탄사가 『동문선』에는 빠져 있는 반면에 장 · 노포 · 책제는 당 · 송대에 유행한 것으로 『동문선』에만 실려 있다.

사독류에서는 이서(移書) 하나만 『동문선』에 빠져 있다. 서발류에는 발이 『동문선』에만 나온다. 이것은 송나라 중엽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장류는 『문선』에만 사론(史論) · 사술찬(史述贊)이 나온다. 따져보면 사론은 논변류에, 사술찬은 송찬류에 해당되는 글이라 하겠다.

시부류에서는 『문선』에만 나오는 칠(七) · 소 · 연주 등이 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갈래로 나눌 수 있는 성격이 못 된다. 다만 수사적으로 분류한 것 같다. 『동문선』에는 율시 · 절구 등으로 분류하고 있으니, 우리 문사들이 성당시(盛唐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송찬류의 경우는 『문선』에만 부명이 나온다. 이것은 송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동문선』에는 송나라 이후에 유행한 치어가 나온다. 이것은 악어(樂語)와 같은 것으로 궁중 연극 때에 사신(詞臣)들이 짓고 영인(伶人)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잠명류는 차이점이 안 보인다. 애제류에서는 『동문선』에만 상량문 · 축문 · 재사 · 청사 등이 나온다. 이것들은 모두 당 · 송대에 유행한 갈래들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선』은 『문선』의 갈래보다도 12개가 더 추가되어 있었으니, 우리의 한문학이 『문선』 위주의 문학에서 충분히 탈피해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산문체의 변화양상

한문은 협의로 말하자면 운문인 시에 상대되는 산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산문의 형식이나 체제는 고정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각 시대마다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먼저 중국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른바 당송고문(唐宋古文)을 거론하면서 그 이전의 산문과 그 이후의 산문이 가지는 특이한 성격을 구별해오고 있다. 먼저 당나라 이전의 산문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은 · 주대 이전, 즉 은과 서주(西周)의 산문이다.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글로는 『상서』가 있다. 이것은 대개 중국 고대 하 이전부터 주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이 글의 특징은 간략하면서도 수식이 적다는 것에 있다.

둘째, 서한시대(西漢時代)이다. 춘추(春秋) 말기로부터 전국(戰國) · 서한에 이르는 기간에 나온 글이다. 크게 사가들의 기사와 기언(記言) 및 개인적인 저술로 나눌 수 있다. 『좌전』 · 『국어』 · 『국책(國策)』 등이 전자에 속하고, 『논어』 · 『맹자』 등 제자백가서가 후자에 속한다.

이 시기에 나타난 산문의 특징은 풍부한 우언(寓言)이나 비유를 통하여 논리성을 세우고, 역사적 서술에 있어서도 이야기가 자주 삽입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시기의 산문은 예술적인 성격보다 학술문이나 응용문에 치중되어 있다. 이전의 산문보다 수사적인 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시기로서 후대의 문장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셋째, 동한(東漢)에서 수대(隋代)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속에는 물론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도 포함된다. 서한시대의 산문을 바탕으로 발전한 이 시기의 문장은 대체로 간략하고 진솔한 서술형식보다는 수식이 많이 가미되면서 과장된 표현이 위주가 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실제의 사실보다 지나친 서술이나 화려한 수식어가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산문체제상 큰 발전을 보였다. 문학이 경학의 응용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른바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는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난 문체이다.

이전의 글들은 대개 짧은 구를 가지고 있다. 육조시대에 오면 한 구에 최소단위의 글자 수효가 넉자나 여섯 자로 길어지고 앞뒤의 글자수를 맞추어 문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유행되었다. 이러한 형식미의 추구는 폐단을 낳게 되어 결국 당나라에 와서 변혁의 요구를 받게 된다. 바로 당대의 고문운동이 그것이다.

당대 고문가들의 주요공격목표는 변문에 있었다. 변문은 대우(對偶 : 둘이 서로 짝 지음)가 각 구마다 필요한 것이 특징이어서 낱말이 상대적인 의미를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음운도 조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세련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변문 중에도 우수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으면 문장구성에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그 결과 정확한 사실을 반영한다거나 사상과 감정을 충분히 나타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으로 대표되는 고문운동가들은 선진시대(先秦時代)와 한 · 육조시대의 문장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신선한 문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성취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설적인 묘사기법을 산문에 도입하였다. 둘째, 육조시대의 문인들이 즐겨 썼던 사경(寫景) 기교를 흡수하여 사용하였다.

셋째, 양한(兩漢) · 육조의 서정소부(抒情小賦)와 잡문의 특징 및 불교문자에 나타난 우언(寓言)들을 섭취하였다. 넷째, 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인 표현을 하는 점에서 선진문을 계승한 점도 있으나,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조리가 있으며 의미가 훌륭히 전달되도록 하는 점에서는 육조시대 현학자(玄學者)의 말이나 불교의 논리적인 태도와 관련된다.

다섯째, 영명(永明) 시체와 근체시(近體詩)의 영향을 받아 정감적인 운치가 나는 산문을 창작하였다. 한유와 유종원에 의한 고문운동은 변문의 제거에 목적이 있었으나, 실제로 변문은 송대 초기까지 유행하였다. 그래서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 등이 중심이 되어 송대의 고문운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송대의 고문운동은 당대의 그것과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변려문을 제외한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일종의 기괴한 현상으로 고벽자(古僻字)와 기이한 구법(句法)을 써서 문장을 난해하게 만들려는 경향이 출현하였던 것다. 이것은 한유 문장의 기괴한 면에 그 책임의 일단이 있다.

따라서 송대의 고문운동은 기괴하고 난삽한 문체를 제거하여 문종자순(文從字順)하는 평이한 문장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당송대 고문운동의 의의는 ‘고문(古文)’으로서 자명(自名)하면서도 고문을 모방하지 않았다. 비교적 통속적이면서도 ‘방언문학’에는 나가지 않았다.

문예적인 글을 쓰면서도 설리(說理)와 서사에 적용하여 아름다우면서도 알맹이 있는 글을 지었다는 데 있다. 당송 이후의 산문은 원나라에서 새로 일어난 희곡의 성행으로 그 정통성이 약화되었다. 명대에 와서 산문은 새로운 변화를 보이게 된다.

명대는 비교적 복고사상이 현저하였던 시기로 당시 팔고문(八股文)의 유행으로 독자적 기풍이 적었던 때였다. 명대 초기에는 아직 뚜렷한 고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동양(李東陽)이 나오면서 당송문을 주창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이몽양(李夢陽)과 하경명(何景明)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 · 한대의 문장과 당대의 시를 전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고문이 한유에 이르러 망했다고 주장하면서, 진 · 한대의 문장으로 돌아갈 것을 격렬하게 역설하였다.

명대의 문인들은 이들의 복고설에 이끌려 동일한 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들이 전칠자(前七子) · 후칠자(後七子)이다. 전칠자의 중심인물은 이몽양과 하경명이고, 후칠자의 주동인물은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이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여 당송문을 주장하는 일부 문인들이 나타난다.

그 대표로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을 찬집한 당순지(唐順之)와 이에 비평을 가한 모곤(茅坤), 그리고 왕신중(王愼中) · 귀유광(歸有光) 등이 있다. 이들은 전 · 후칠자의 힘보다는 뒤떨어졌으나, 명 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양파가 대립하였다.

이들 양파가 주장한 복고는 당송고문가들의 그것과 차이점이 있다. 당송의 고문은 비판적인 복고에 의의가 있다 한다면 명대의 복고는 복고를 위한 복고에 그친 셈이다. 즉,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건설하는 데는 모자란 감이 있다.

청대는 문학의 부흥기라 할 만큼 정통적인 변문 · 산문 · 시사(詩詞)와 아울러 통속적인 희곡 · 소설문학이 다 같이 발달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사조 역시 복고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 먼저 변문의 성행이다. 변문은 위진남북조 이래로 사부류에서 특히 발달하였다가, 이른바 ‘사륙문(四六文)’이라는 변문은 한유의 고문운동 후에 당말에 이상은(李商隱) · 온정균(溫庭筠) 등이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변문이 청대에 와서 다시 성행하게 된 까닭은 청대의 학술과 연관되어 있다. 청대의 한학자들이 송 · 명대의 학문연구 태도를 거부하면서 송 · 명대에 성행하던 고문복귀운동도 동시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른바 ‘팔대가(八大家)’로 불릴 만큼 뛰어난 변문가들이 배출되었다.

홍양길(洪亮吉)은 극단적인 변문가이다. 급기야 완원(阮元) 같은 이들은 남북조시대에 말한 ‘문(文)’과 ‘필(筆)’을 구분할 것을 강조하고 변문이야말로 문사에 치중하기 때문에 참다운 문학이고, 산문은 필에 속하므로 문학이 될 수 없다 하여 문예문 위주의 유미주의적 문학론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변문의 성행에 대해서 산문 즉 고문을 주장하는 문인들도 있었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복고는 당 · 송대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고문을 창도한 사람으로 방포(方苞)가 있다. 그는 고문을 짓는 구체적 방법론까지 제시한 바 있다.

어록체의 말을 쓰지 말 것, 위진남북조시대의 화려하고 격식에 맞춘 말투는 피할 것, 한대의 부같이 글자만 맞추는 것과 시가 중에서 고운 말이나 남북 역사에 나오는 교묘한 말투 등을 따오는 것을 피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방포의 노선을 추종하여 유대괴(劉大魁)와 『고문사유찬(古文辭類纂)』을 편찬한 요내(姚鼐) 등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을 바로 주4라 부른다. 동성파 산문의 특징은 조리를 갖추고 규율을 엄하게 지키는 고문을 짓는 데 있다. 그래서 글이 평이하고 청담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격률이나 의법이 엄하여 작자의 의경을 자유롭게 나타내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있음이 단점이다. 동성파의 폐해는 단점이 극대적으로 나타나자 더욱 심해진다.

이러한 산문(고문)이나 변려문은 근대에 대두된 신문학운동의 물결 속에서 그 명맥을 다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고문이나 변문이 모두 중국의 영향 하에서 창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치부해서도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생활과 정서가 배어 있는 것이기에 독자적인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대체로 삼국 · 고려 시대에는 『문선』의 영향이 심했으므로 변문의 성행은 피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완전히 고문만이 수용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관각(館閣)에서 사용된 문자는 거의 변문이었다. 고문은 본격적으로 고려 말 이제현으로부터 창도되었다. 이제현이 모범으로 여긴 것은 당송의 고문이었다.

그 뒤에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의 빈번한 교류에 힘입어 고문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크게 나누어서 주5와 당송고문을 위주로 하는 당송고문파로 구분할 수 있다. 이제현이 창도한 고문은 그의 제자인 이색 등이 정주학(程朱學)에서 즐겨 쓰는 어록과 주소체(註疏體)를 혼용함으로써 차츰 본령을 벗어나게 되었다.

최립(崔岦)이 명나라의 이반룡과 왕세정의 영향을 받아 의고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밖에 신유한(申維翰)허목(許穆) 등도 의고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복고를 위한 모방에 치우쳐 다소 독창성이 결여되었다. 이와는 방향을 달리하여 개성을 중시하면서 고문을 완성시킨 문인들이 있다.

허균(許筠) · 장유(張維) · 이식(李植) · 김창협(金昌協) · 박지원(朴趾源) · 홍석주(洪奭周) · 김매순(金邁淳) · 이건창(李建昌) · 김택영(金澤榮) · 이남규(李南珪) 등이 이에 속한다.

김택영은 『여한구가문(麗韓九家文)』이라는 고문가들의 작품을 편집하였다. 여기에 속한 문장가들의 작품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기는 하였으나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준 산문문학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동문선(東文選)』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
『문선(文選)』
『문심조룡(文心雕龍)』
『문장류별지론(文章流別志論)』
『고문사유찬(古文辭類纂)』
『경사백가잡초(經史百家雜抄)』
『한문신강(漢文新講)』(이가원, 신구문화사, 1960)
『중국문학사』(호운익(胡雲翼) 저, 장기근 역,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61)
「고문(古文)의 원류와 성격」(김도련, 『한국학논총』 2, 국민대학교, 1979)
『唐宋古文八家槪述』(吳孟復, 安徽敎育出版社, 1985)
『한국문학통사』 3·4(조동일, 지식산업사, 1984)
주석
주1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죄과가 가벼운 죄인을 풀어 주던 일.    우리말샘

주2

일정한 기간 안에 행정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 강제 집행 한다는 내용을 문서로 알리는 일.    우리말샘

주3

한문으로 쓴 책.    우리말샘

주4

중국 청나라 때, 당송 팔대가의 문장을 표준으로 삼고 주희 등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던 고문(古文) 문장가들의 무리. 대표자 방포(方苞), 유대괴(劉大櫆), 요내(姚鼐) 등이 안후이성(安徽省)의 동성(桐城) 출신이어서 이렇게 불렀다.    우리말샘

주5

중국의 명나라 시대에 복고에 치중하여 문장은 반드시 진한대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문장가들. 조선의 고문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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