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았다. 1797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1802년(순조 2) 정언이 되었으며, 1807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참판이 되고, 181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1832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183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를 제배받고 1842년에 졸하였다.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는데도 자품이 고요하고 겸허해 처하기를 평민과 같이하였다. 그리고 학문이 심수하고 의리에도 정통해 시서역예(詩書易禮)의 교훈과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철학에 달통하였다. 그는 특히 도학가적인 문학론을 전개해 “심외무부(心外無父)요 도외무심(道外無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문(文)’이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닦아지고 학문이 쌓이면 그것이 덕(德)도 되고 도(道)도 되며, 어(語)도 되고 문도 된다. 바로 도 · 덕 · 어 · 문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마음의 공부도 없이 입만으로 인의성경(仁義誠敬)을 외치므로 말은 문과 맞지 않고 마음은 말과 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진(秦) · 한(漢)의 고문(古文)을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면서 의고문가(擬古文家: 秦漢派)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진 · 한의 고문은 한유(韓愈) · 구양수(歐陽修) 같은 대문호도 미칠 수 없음을 탄식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를 배우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삼라만상이 쉬지 않고 변하므로 지금에 와서 복고가 안 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되어 안 되는 것이라며 시의에 맞는 진솔한 글을 쓸 것을 역설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은 “보취(步趣)에 법도가 있어 구확(矩矱)의 밖을 넘지 아니하며, 우여용용(紆餘舂容)해 감격적이면서도 상하지 않으니 실로 치세(治世)의 글이다.”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연천집』 · 『학해(學海)』 ·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 『동사세가(東史世家)』 · 『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고, 편서로는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 『상예회수(象藝薈粹)』 · 『풍산세고(豊山世稿)』 · 『대기지의(戴記志疑)』 · 『마방통휘(麻方統彙)』 · 『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