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의 앞면은 자적선사(속명 김홍준)의 사적을 적은 것이고 음명은 이 사찰이 왕명에 의하여 중창된 사실을 적은 것이다. 그 가운데는 중앙의 도평성(都評省)에서 내린 첩문(帖文)도 들어 있다. 이는 현재로는 고려 최초의 문서이고 이두문이다.
“都評省帖 洪俊和尙 衆徒 右法師. 師矣 啓以 僧矣段 赤牙縣 鷲山中 新處所 元關爲 成造爲內臥乎亦在之 白賜. 縣以 入京爲 使臥 金達舍 進置 右寺 原 問內乎矣 大山是在以 別地主 無亦 在彌 衆矣 白賜臥乎 貌如 加知谷 寺谷中 入 成造爲 賜臥亦之 白臥乎 味 及白. 節中 敎旨 然丁 戶丁矣 地○知事者 國家大福田處爲 成造爲 使賜爲 敎. 天福 四季 歲次 己亥 八月 一日 省史 目光. 五年 辛丑 八月 二一日 國家以 山院名 幷 十四 州郡縣 契乙 用 成造令賜之 節 成造使 正朝 仁謙.”
“도평성에서 홍준화상 중도의 우법사에게 첩문을 보내어 알린다. 사(師)의 계(啓)에 의하면 승(僧)의 경우에는 적아현(赤牙縣)의 취산(鷲山)에 신처소(新處所)를 처음으로 (조정에) 보고하여 (사찰을) 조성하고 있는 바이라고 보고하시었다. 현(縣)으로부터 입경(入京)하도록 부림을 받은 김달사가 (도평성)에 출두하여 우사(右寺)의 터를 묻되 대산(大山)이므로 따로 지주(地主)가 없으며 스님들의 보고하신 모양과 같이 가지곡(加知谷)의 사곡(寺谷)에 들어가 조성하시고 있는 바이라고 사뢰는 뜻을 직접 보고하였다. 이때에 교지(敎旨)가 내렸으니 ‘그러한가, 호정(戶丁)의 지(地)를 지사자(승려)가 국가의 대복전처로 삼고 (이를) 조성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부리시도록 하라.’고 명하시었다. 천복 4년 을해 8월 1일 성사 목광. 5년 신축 8월 21일 국가로부터 산원명(山院名)과 함께 14개 주·군·현의 계(契)로써 조성시키시었다. 이때의 성조사는 정조 인겸이다.”
이두문은 완전히 우리말의 어순으로 쓰였고 토도 신라시대보다는 훨씬 길어져 국어의 표기가 섬세해졌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