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청(校正廳)은 조선시대, 서적 편찬 시 검토 및 교정을 위해 임시로 설치하였던 관서이다. 법전이나 왕실 보첩류, 전례서를 비롯한 국가에서 제작하는 서적을 검토하고 교정하는 기능을 하였다.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정 · 간행하며 처음 설치되었다. 선조 때에는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正廳)이 설치되었다. 교정청에서는 국왕의 어제(御製)를 교정하기도 하였고, 광해군대에는 흠경각(欽敬閣) 복원을 위한 교정청도 설치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법전이나 왕실 보첩류, 전례서를 비롯한 국가에서 제작하는 서적을 검토하고 교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1470년(성종 1)에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수정 · 간행을 진행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1471년(성종 2), 면밀한 교정을 거쳐 완성된 『경국대전』에 미진한 부분이 발견되어 교정청에서 130여 개를 다시 교정하였으며, 1474년(성종 5)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1481년(성종 12)에 『경국대전』을 다시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듬해 설치된 감교청(勘校廳)에서 1484년(성종 15)에 교정을 완성하였고, 1485년(성종 16)에 최종적으로 『경국대전』이 간행, 반포되었다.
이처럼 교정청은 『경국대전』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설치되어 보완 · 교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493년(성종 24)에 『경국대전』 이후에 마련된 수교와 대전에 기록되지 않은 조항들을 모아 『 대전속록(大典續錄)』을 발간하면서 교정청을 설치하여 검토와 교정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교정청은 법전 이외에도 서적이나 왕실 보첩, 전례서 등을 제작할 때 설치되었다. 1585년(선조 18)에 소학과 사서의 번역에 대한 교정을 위해 설치되었고, 1601년(선조 34)에 5경에 대한 정비 · 개정을 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경서에 대한 교정은 현종 때에도 이루어졌다. 1668년(현종 9), 성균관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을 설치하여, 경서의 잘못된 자획과 음의(音義)를 교정하도록 하였다.
1603년(선조 36), 『선원록(璿源錄)』을 개정하기 위해 선원록 교정청을 설치하였고, 1605년(선조 38)에는 태조의 4남 회안대군 방간(芳幹)과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의 신설(伸雪)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왕실 보첩 제작과 이에 대한 교정청 설치는 숙종 대 이후 자주 있었다. 1681년(숙종 7년), 왕실 보첩류 서적에 대한 교정 작업을 진행하여 『어첩(御帖)』 1권, 『선원록』 51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7권, 『왕비세보(王妃世譜)』 3권을 간행하였다.
영조 대에는 왕실 보첩류 간행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우선 영조 즉위 초에 선원록 교정청이 설치되어 1735년(영조 11)에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열성팔고조도(列聖八高祖圖)』, 『 국조어첩(國朝御牒)』을 완성하였다. 『선원계보기략』을 목판으로 간행하면서 이후 추가되는 수정 사항을 거듭 교정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수정을 정례화하였으며, 종부시에서 교정관을 차출하여 수정과 교정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에 숙종의 어제를 발간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고 당상과 낭관을 차출하여 목판으로 간행하도록 하였다. 정조도 즉위한 후, 영조 행장 편찬을 위해 설치된 찬집청(撰集廳)과 함께 영조 어제를 교정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1867년(고종 4), 정조 때 편찬되었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였던 『 춘관통고(春官通考)』를 간행하기 위하여 이듬해 춘관통고교정청(春官通考校正廳)이 설치되었다. 고종 때에는 『오례편고(五禮便攷)』, 『 대전회통(大典會通)』, 『 양전편고(兩銓便攷)』 등의 편수(編修)를 위하여 교정청이 설치되었으며, 교정청 당상들이 편수를 진행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흠경각을 지으면서 흠경각 교정청을 설치하여 흠경각의 오차를 교정하도록 하였다.
법전과 왕실 보첩, 어제, 전례서, 경서 등 국가에서 편찬 · 간행하는 각종 서적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교정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이를 통해 발달된 기록문화와 왕실의 귀중한 유산을 간행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