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에 원흥사(元興寺) 종연(宗然)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고, 1258년(고종 45) 19세에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상품과(上品科)에 급제한 뒤 국녕사(國寧寺)에 머물렀고, 1268년(원종 9)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29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되어 유식학을 강의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당시의 표준이 되었고 삼중대사가 주법이 된 것은 미수가 처음이라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웅신사(熊神寺), 장의사(莊義寺), 법주사, 중흥사(重興寺), 유가사(瑜伽寺), 동화사(桐華寺) 등에 주석하였고, 국존(國尊)이 된 뒤에는 법주사가 하산소(下山所)로 지정되었다. 승과 급제 후 삼중대사, 수좌, 승통으로 승계가 승차되었으며 여러 중요한 법상종 사찰의 주지뿐만 아니라 석교도승통(釋敎都僧統),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숭교원 교학(崇敎院 敎學),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 등의 여러 승직을 역임했다. 1315년(충숙왕 2)에는 충숙왕의 명으로 참회부(懺悔府)를 세우고 승정을 담당하였다. 왕사를 거쳐 1324년(충숙왕 11) 국존에 책봉되었다. 제자로는 원흥사 주지 거현(居玄), 기림사(祇林寺) 주지 행영(行英), 천신사(天神寺) 주지 충서(冲瑞) 등 314인이 있다.
법주사에 있을 때에는 후학들을 위하여 장소(章疏)를 지어 세상에 유포하라는 왕명에 따라 경론에 대한 주석서 92권을 저술하였다. 유가사에서는 충렬왕의 명으로 『대반야경(大般若經)』 난신해품(難信解品)을 해석하여 원나라의 승려들을 깨우쳤고, 『심지관경(心地觀經)』의 주석서를 지어 충렬왕에게 바치고 당시 벌어졌던 논쟁을 중지시켰다. 1318년(충숙왕 5)에는 충숙왕의 명으로 대민천사(大旻天寺)의 강원(講院)에서 삼가(三家)의 장소(章疏)를 강설하는 등 충렬왕~충숙왕 대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 불교를 이끌었다.
시호는 자정국존(慈淨國尊)이며, 탑호(塔號)는 보명(普明)이다. 1342년(충숙왕 복위 3) 음력 9월 탑과 탑비를 법주사에 세웠다. 비문은 왕명으로 이숙기(李叔琪)가 지었으며, 탑은 법주사 산호전(珊瑚殿) 동쪽에 마련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