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황사(扶皇寺) 서남쪽 아래인 이곳은 옛날부터 신라의 의상(義湘)이 참선하던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이 때문에 절 뒤쪽의 봉우리를 의상봉이라 하였다. 유정(惟政)은 조선 후기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이곳에 사찰이 들어선 것은 북한산성의 축조와 연관되어 있다.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던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숙종 39년(1713)에 당시의 승려 청철(淸徹)과 청선(淸禪)이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의승(義僧)을 뽑았고 이들 의승을 산성 안에 두고 수비와 관리를 위해 13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을 지었는데 국녕사(國寧寺)는 이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어 병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사세가 확장되었을 때는 86칸에 이를 정도의 큰 규모의 절이었다. 국녕사의 위치로 보아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성벽과 그 중간에 위치한 가사당압문(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지만 대일항쟁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폐사되었다. 그 후 폐허가 된 터에 비구니 보경이 임시 건물을 짓고 50년간 사찰의 명맥을 유지했는데, 이 건물도 1991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단법인 능인선원의 원장인 지광이 조계종의 의뢰를 받고 1998년 10월부터 불사에 착수해 사찰을 복원하였는데, 현재는 보경이 주지를 맡아 능인선원의 수련원으로서 중창 불사를 이끌고 있다.
사찰의 건물로는 대웅전·관음전·삼성각·등룡각·종각·요사채(종무소) 등이 있다. 이외에 최근에 노천에 조성한 국녕대불 즉 합장환희여래불(合掌歡喜如來佛) 좌상이 자리를 하고 있다. 불상이 합장한 양식은 우리나라의 기존 불상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지광이 중국 돈황석굴의 도상을 보고는 재현하게 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불상 조성 시에는 『신수대장경』의 도상부를 참고하였다. 합장은 양손을 모아서 중생과 부처의 차별 없이 수행을 통해 정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녕대불 뒤의 의상봉 아래에 석주 모양으로 불쑥 올라와 있는 석봉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접근할 수 없어 조사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 보면 어렴풋이 반가사유상을 취한 마애불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불에서 우측 방향으로 돌아가면 근래에 복원한 ‘ㄱ’ 자형으로 된 동기와을 올린 백운당(白雲堂)이라는 요사채(공양간)이 있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면 새로 쌓은 높은 축대위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에 이르는 계단이 끝날 무렵 향 우측으로 단칸의 등룡각(登龍閣)이라는 누각이 있다. 1층은 콘크리트에 돌을 붙여 만든 팔각평면이고 위층은 목조 방형누각이다. 이 누각에 오르면 계곡 건너편 준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장대석 기단 위에 화강석 원형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워 지었으며 공포는 다포형식이고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이다. 한식 동기와를 얹었는데 용마루 양쪽에는 용두로 장식했다. 다포 대웅전의 일반적인 웅장함과 화려함을 지녔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쪽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대웅전에 이르는 통로는 원래 우측 방향의 등룡각 쪽 계단이 아니라 지금도 남아있는 좌측 방향의 바위동굴인 관음굴을 경유했다고 한다. 대웅전 뒤 언덕 위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방형기둥에 초익공형식의 건물로 동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이다. 절로 올라가는 계곡 오른쪽에는 ‘한월당대선사(漢月堂大禪師)’라는 명문이 새겨진 석종형 부도 1기가 있다. 지대석 중앙에 돌기를 두어 석종을 받치고 있으며 위가 넓은 석종형 탑신 위에는 탑신과 한 몸으로 연봉형태의 상륜을 올린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승영사찰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국녕사를 비롯해 근래에 사단법인 불광사가 복원한 중흥사와 태고사(암)·진관사·노적사·승가사·상운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