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이제어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동명사 어미는 ‘*-r, *-m, *-n’ 등인데 국어에 있어서도 이들 어미의 반사형(反射形)이 각기 ‘-ㄹ, -ㅁ, -ㄴ’ 등과 같이 확인되어 국어와 알타이제어 간의 친족(親族) 관계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위의 동명사 어미들 가운데서 ‘-ㄹ, -ㄴ’ 동명사는 현대국어에서는 부가어적 용법, 즉 관형사형 어미로만 실현되고 있지만, 중세국어에서는 더러 명사적 용법을 보이기도 하였다.
‘얼운’( >‘어른’, 長者)은 동사 ‘얼-’[女家]에 ‘-ㄴ’이 붙은 동명사가 굳어져 파생명사가 된 것이며, 또한 ‘다○ 업스니, 두루 아니○ 아니ᄒᆞ시나’는 ‘-ㄹ’ 동명사가 ‘없-’[無], ‘아니-’[不] 앞에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인 예이다. 이외에도 ‘위화진려(威化振旅) ᄒᆞ시ᄂᆞ로’의 예는 ‘-ㄴ’ 동명사가 조사 ‘ᄋᆞ로’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ㄴ, -ㄹ’ 동명사의 명사적 용법은 고대에서는 더욱 일반적이었을 것인데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크게 위축되었고, 현대국어에서는 부가어적 용법으로만 쓰이고 있다. 한편, ‘-ㅁ’ 동명사는 현대국어에까지 명사적 용법을 보이고 있는데, 중세국어에서는 명사형 어미로 거의 ‘-ㅁ’ 동명사가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명사형 어미 ‘-기’는 아직 덜 발달된 상태였으나 근대국어 이후 점차 ‘-ㅁ’이 하던 일을 ‘-기’가 담당하게 되었고, 현대국어의 일반구어에서는 오히려 ‘-기’가 더 활발히 쓰이게 되었다. 최근에는 관형사형 어미 ‘-ㄴ, -ㄹ’과 의존명사 ‘것’의 결합 구성인 ‘-ㄴ것, -ㄹ것’ 명사절이 그 분포를 크게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명사형, 또는 좁은 의미에서의 동명사란 동사이면서 명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동사’는 정확히 말하여 동사·형용사를 포함하는 용언이다. 이하에서는 동사는 곧 용언과 동의의 개념으로 사용하기로 하겠다.). 위 정의에서 ‘동사이면서’라고 함은 명사형이 품사로서는 어디까지나 동사에 속함을 일컫는 것으로서, 이는 동사를 명사로 전성시킨 파생명사와는 다름을 뜻한다.
즉, ‘날개, 길이, 지게’에서와 같이 동사 어근 ‘날-[飛], 길-[長], 지-[負]’ 등에 ‘-개, -이, -게’ 등의 파생접미사가 붙어 명사로 완전히 바뀐 파생명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요컨대, 파생명사는 동사적 성격을 거의 완전히 상실한 것이지만, 명사형은 동사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사형은 일반적인 동사와 마찬가지로, 첫째, 부사 특히 양태부사의 수식을 받을 수 있고(예 : “[잘 죽기]가 어렵다.”), 둘째, 시제나 높임법의 선어말어미를 동사 어간 뒤에 개재시킬 수 있다(예 : 믿었음, 믿겠기, 오시기 등), 셋째, 일반동사처럼 서술어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예컨대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았다.”라는 예문에서 ‘떠나다’의 명사형 ‘떠났음’이 명사절의 주어 ‘그가’에 대한 서술어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앞서의 정의에서 ‘명사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함은 명사형이 일반적 명사와 마찬가지로 조사(助詞)를 취하면서 주어·목적어·보어 등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빨리 감이 좋겠소.”에서는 동명사가 전체 문장의 주어로 기능하고 “그는 내가 혼자 살기를 바라오.”에서는 전체문장의 목적어로,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도서관에서 공부함이 아니다. ”에서는 보어로 각기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사적 용법의 동명사 ‘-음, -기’는 각기 그 쓰이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이 주목되어 왔다. 예를 들어 “동생이 집에 [왔음이/왔기가] 분명하다.”와 “철수가 집에서 총소리가 [남을/나기를] 들었다.” 등의 예문에서는 ‘-기’ 동명사가 쓰이지 못하며, “사람들이 [떠나기/떠남] 시작하였다.”에서는 ‘-ㅁ’ 동명사가 쓰이지 못한다.
이러한 ‘-ㅁ’과 ‘-기’의 분포 차이에 대한 논의가 여러 각도에서 시도되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서 최현배(崔鉉培)는 ≪우리말본≫에서 ‘-ㅁ’ 명사형은 결과 또는 사실의 서술을 주로 나타내는 데 반해서 ‘-기’ 명사형은 방법 또는 과정에 초점을 둔 표현이라고 하였다.
‘-ㅁ’과 ‘-기’가 함께 나타날 수 있는 “빨리 [감이/가기가] 좋다.”라는 예문에서도 ‘감이’가 선택될 경우는 결과에 초점이 주어지며 ‘가기가’가 선택될 경우는 방법이나 과정에 초점이 주어짐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반드시 명쾌하게 그어지는 것은 아니고 서로 넘나드는 경우도 있어, 국어 문법의 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변형생성문법에서는 전통적으로 명사형 어미라고 부르던 것을 명사화소(名詞化素)라고 하여 ‘-음’과 ‘-기’의 동사·의미론적 특질의 구명에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