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수(梵修)는 8세기 말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화엄종의 승려로 당에 유학하여 화엄학을 배웠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승전촉루(勝詮髑髏)’조에 짧게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범수는 당에 가서 799년(소성왕 원년)에 신역후분(新譯後分) 『화엄경(華嚴經)』과 『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갖고 돌아와 가르쳤다고 한다.
범수가 가져온 신역후분 『화엄경』에 관해서는 80권본 『화엄경』인지 40권본 『화엄경』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화엄경』은 중국불교에서 60권본(晋本, 418420 성립), 80권본(695699년 성립), 40권본(貞元本, 796~798년 성립) 등 3 종류의 한역본(漢譯本)이 있다. 이 가운데 80권본 『화엄경』은 8세기에 신라 불교계에서 수용,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신역후분(新譯後分)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40권본 『화엄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40권본 『화엄경』은 징관(澄觀)과 계빈삼장반야(罽賓三藏般若)가 함께 번역하였으며, 특히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 행각을 하는 내용을 담은 「입법계품(入法界品)」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관사의소』는 징관의 『화엄경』 주석서를 가리키지만, 어떤 문헌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범수가 가져온 『화엄경』이 40권본이라면 징관이 저술한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이 주석서가 완성된 것은 범수가 귀국하기 직전이므로 실제 가능하였던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또한 징관은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인 『화엄경소(華嚴經疏)』,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등을 787년에서 791년 사이의 시기에 제시하였다. 따라서 범수가 가져온 징관의 주석서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 화엄학의 전개과정에서 징관의 화엄학 주석서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