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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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백제의 제27대(재위: 554년~598년) 왕.
이칭
이칭
창(昌), 부여창(夫餘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525년(성왕 3)
사망 연도
598년(혜왕 1)
출생지
백제
주요 관직
백제 제27대 국왕(재위: 554∼598년)
관련 사건
관산성전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위덕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54∼598년이다. 한강 하류지역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해 성왕이 전사하자 즉위했다. 태자로서 이 전쟁을 적극 주장했기 때문에 즉위 초 패전으로 인한 혼란수습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체제정비에 전념했다.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의 강화, 역사서 「백제본기」 편찬 등으로 왕권기반이 강화되었다. 신라·고구려에는 적대 정책을 취하고 북제·북주·수와는 활발한 외교를 펼쳐 국제적 위상도 되찾았다.

정의
백제의 제27대(재위: 554년~598년) 왕.
개설

1991년에 부여 능산리(陵山里)에서 발견된 화강석제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555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름은 창(昌). 성왕(聖王)의 맏아들이다.

생애 / 활동사항

태자 때 성왕을 도와 신라 공격에 앞장섰다. 당시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군을 중심으로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구성된 북진군을 일으켜 고구려공격에 나섰다. 그 결과, 백제는 475년(문주왕 1)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6군(六郡)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맹국인 백제를 배반한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密約)을 맺은 뒤, 무력으로 한강 하류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성왕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꾀하였다. 이 때 백제의 조정에서는 신라정토(新羅征討)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정토군을 일으키는데 적극적인 소임을 한 사람이 바로 태자 창이었다. 신라정토군의 선봉에 나선 창은 마침내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을 비롯해 3만명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 성왕의 전사로 인해 태자 창은 왕위에 올라 위덕왕(威德王)이 되었다.

위덕왕대 연구는 크게 2가지 상반된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관산성 패전 이후 성왕대 신장되었던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이 쇠퇴하고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무왕(武王)대 이르러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위덕왕 집권 초기에는 관산성 패전의 충격으로 일시 왕권이 약화되었으나, 성왕대의 정책을 계승하고 전쟁과 대외관계의 강화를 통해 왕권강화를 이룬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위덕왕은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안으로는 패전으로 인해 야기된 정정(政情)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야 했고, 밖으로는 실추된 백제국가의 위상을 되찾아야 했다. 대내외적 위기에 몰린 위덕왕은 출가수도(出家修道)를 결행하려 했다. 위덕왕의 출가는 관산성 대패와 성왕의 죽음으로 신라정벌을 반대했던 신하들의 책임추궁을 받아 정치적 곤경에 빠지는 것을 모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위덕왕은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국왕직을 걸고 출가수도 문제를 던져보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출가할 경우 성왕에 대한 효행(孝行)을 불교를 통해 몸소 실천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수 있어 어느 면에서는 그의 정치 · 사회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왕의 출가는 전투의 패전과 성왕의 죽음 이후 설상가상으로 왕위계승상의 혼란마저 야기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 동안 전쟁을 반대해왔던 신하들은 왕권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데 목적이 있었지 국왕의 출가수도와 같은 극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위덕왕은 출가수도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철회했고 1,000명의 백성들을 도승(度僧)하고 많은 공덕을 베푸는 선에서 신하들과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도승은 국왕의 허락하에 출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 도승된 승려들은 국가에서 공인하는 승려가 된다. 따라서 위덕왕이 불교적인 도승행사를 통해 대신들과의 타협을 이루어 낸 것은 당시 왕권 약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위덕왕이 기로(耆老)를 포함한 대신들과의 타협과 조화를 통해 실추된 왕권과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덕왕은 왕위에 오른 후 먼저 신라에서 송환된 부왕의 유해를 빈소에 안치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장례의식을 준비해 나갔다. 그리고 성왕의 위업을 기리고 추복을 위해 부여 능산리 왕릉 묘역에 국가적인 대규모사업인 능사(陵寺)를 창간하였다. 1993년에 발굴조사된 이 절터는 목탑 · 금당 ·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 절의 제3건물터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를 비롯한 유리구슬 · 토기류 · 연꽃무늬수막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는 목탑지의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이 출토됨으로써 이 절이 위덕왕 13년(566)경에 창건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의 명문에 의하면, 백제 창왕 즉 위덕왕 13년(566)에 매형공주(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것이다. 공주는 성왕의 딸이자 위덕왕의 누이동생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규모의 능사가 조성되는 데에는 많은 인력과 물력이 소요되므로 공주 한 개인에 의해 건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공역에는 위덕왕은 물론 성왕계 왕족들이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고 효를 실천하기 위해 능사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능산리 능사의 낙성은 성왕의 패사 이후 위덕왕 집권 초기의 혼란했던 지배질서를 극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왕의 위업을 추모하여 성왕의 중흥사업을 계승한다는 위덕왕의 의지를 대내적으로 천명하는 백제왕권의 상징물로 이해된다.

위덕왕 14년(567) 이후에는 거의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위덕왕은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위덕왕은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二十二部司制)의 강화, 「백제본기(百濟本紀)」와 같은 역사편찬으로 왕실의 권위를 정당화시키려는 이념의 수립 등을 통해 점차 왕권기반의 구축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위덕왕 14년(567)부터는 『삼국사기』에 대외관계 기사가 나타나는데, 집권 전반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집권 전반기에는 대신라 보복전의 전개와 성왕의 추복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면 위덕왕 14년 이후인 집권 후반기부터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하였다. 이 시기 중국왕조인 북제(北齊) · 북주(北周) · 수(隋)를 대상으로 백제사상 가장 많은 대외교섭 횟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북제로부터 570년에는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에 책봉되고, 571년에는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반면 왜와의 외교 교섭은 그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백제와 왜 간에 교섭이 단절하게 된 배경에는 성왕대의 왜 관계를 추진했던 세력이 관산성 전투 이후 쇠퇴하였을 가능성과 신라에 의해 대왜 교통로가 단절되었을 가능성 양자를 보고 있다. 무엇보다 관산성전투와 같은 백제의 대규모 전투 당시 왜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과 삼국 간에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감에 따라 왜의 군사적 비중이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는 백제의 현실적인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해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98년(위덕왕 45)에 수나라가 고구려공격을 준비함을 알고 스스로 군도(軍導)가 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해서도 관산성패전을 설욕하려고 빈번히 국경을 침범하는 등 국세의 만회를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박윤선,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신앙 연구』(길기태, 서경, 2006)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상황과 대외관계」(김병남, 『한국상고사학보』43, 2004)
「백제 위덕왕대 부여 능산리 사원의 창건」(김수태, 『백제문화』27, 1998)
「사비시대 백제지배체제(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변천(變遷)」(노중국,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韓佑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한국사(韓國史)-고대편(古代篇)-』(이병도,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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