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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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개념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 의식을 집행하는 의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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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금강계단(金剛戒壇)은 수계를 위해 설립한 의례 공간인 계단을 가리킨다. '금강'이란 계율이 금강처럼 굳건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율장에 따르면 규정에 따라 여법하게 만들어진 계단에서 일정한 자격을 갖춘 비구들의 심사와 증명을 거치고 250여 개의 율의조문을 수지할 것을 맹세함으로써 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계단은 불교의 전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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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 의식을 집행하는 의례 공간.
내용

금강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계는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것'을 의미한다.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은 부처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띤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 하고,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혜는 계학(戒學) · 정학(定學) · 혜학(慧學)의 삼학(三學)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삼학 가운데 계율이 으뜸이라 하였다. 이어 계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곳이 으뜸이라고 하였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금강계단이라고 하였다. 금강계단의 전면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건 전각을 건립하는데, 그곳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금강계단에는 불(佛)을 상징하는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그 자체로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계단의 기원에 대해 확정된 설은 없다. 대체로 초기에는 별도의 계단 없이 공터에서 의식을 행하다가 계장(戒場)에 별도로 흙이나 돌을 쌓아 단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다만 남산율종의 종조(宗祖)인 도선(道宣)이 지은 『계단도경(戒壇圖經)』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누지(樓至) 비구가 단을 세워 결계(結戒)와 수계(受戒)를 행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부처님께 요청하였다. 이에 부처께서는 세 개의 단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두 개의 단은 불원(佛院)의 동쪽과 서쪽에 두었는데 비구와 비구니의 결계를 행하는 데 사용하는 단이고, 한 개의 단은 외원(外院, 僧院)의 동문 남쪽에 두었는데 비구의 수계를 위해 사용하는 단이다."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부처님께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원정사가 계단의 기원과 관련된다고 보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계단의 성립은 수계갈마(受戒羯磨)와 관련이 깊다. 계단은 수계 의식을 행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율장에 따르면, 수계 의식은 10인 승가(僧迦)가 이루어졌을 경우에만 행할 수 있다. 모든 갈마는 전원이 출석하는 화합갈마여야 한다. 그러므로 수계 의식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10인 승가의 경우, 10인이 모두 참석해야 한다. 만약 15인 승가일 경우에는 15인이 모두 참석해야 한다. 수계 의식이 빈번하게 이루어질 경우, 이러한 규정은 현전 승가의 구성원 전원이 모여야 함으로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계단 제도이다. 현전 승가 전원이 참석할 수 없을 경우, 계외(界外) 또는 계내(界內)에 독립적인 소계(小界)를 만들고 필요한 인원만큼 일시적으로 현전 승가를 만들어 갈마를 행하는데, 이러한 장소를 계장(戒場), 계장(界場), 계단 등으로 불렀다. '계(戒)'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계단은 본래 비구 지원자에게 비구계를 주는 10인 승가를 성립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계외라서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곳이면 사방에 돌이나 목재같은 것으로 표식을 삼아 계상(界相)의 경계를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20인의 승가일지라도 비구 10인의 출석만으로 전원 출석이 인정되어 수계의 유효성이 인정될 수 있었다. 이렇듯 초기에는 표식의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고정적인 설비를 갖춘 계단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 인도 나란타사에 계단이 있으며, 그 형태와 크기, 중앙에는 소탑(小塔)이 있고 소탑 안에는 불사리를 봉안했음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중국에서는 유송(劉宋) 원가 11년(434) 승가발마(僧伽跋摩)가 남림사(南林寺)에서 계단을 설립하여 수계한 것이 시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선은 『계단도경』에서 그보다 앞서 진(晉)의 법태(法汰), 도안(道安), 지도림(支道林), 도생(道生) 등이 계단을 설립하였다고 전하지만 이들의 계단은 승가발마의 계단처럼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당나라 건봉 2년(667년) 도선(道宣)이 장안에 있는 정업사(淨業寺)에 계단을 건립함으로써 정식으로 계단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얻어 귀국한 자장(慈藏)통도사에 최초로 계단을 만들었다. 당시 통도사 계단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서역과 중국의 법식에 따라 불사리를 계단의 중앙에 봉안하고 2단 정도의 단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통도사 계단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것이다. 그러나 중앙에 불사리를 봉안한 석종형 부도(石鐘形浮屠)가 있고 부도의 사방 평면에 2단의 석단(石壇)이 있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의 형태와 구조를 알 수 있다.

통도사의 계단과 함께 널리 알려진 금강계단으로는 개성 불일사(佛日寺) 계단과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계단, 금산사(金山寺)의 방등계단(方等戒壇) 등이 있다. 용연사 계단은 임진왜란 때 통도사의 불사리 일부를 묘향산으로 옮겨 봉안한 것이며, 불일사와 금산사의 계단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중 계단 앞에 석등을 세우는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석탑을 세운 금산사의 계단은 고려시대 계단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계단이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사토 미츠오 지음, 김호성 역, 『초기불교교단과 계율』(민족사, 1991)
장충식, 「한국석조계단고(韓國石造戒壇考)」(『불교미술』 4, 동국대학교박물관, 1978)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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