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문명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등기는 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하던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시대에 따라 토제등기에서 금속제 · 석제 등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경전에 의하면, 이미 옛날부터 동제(銅製) · 철제(鐵製) · 와제(瓦製) · 목제(木製) 등 다양한 종류의 등기가 있었으며, 연료로는 기름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석등’이라는 명칭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유물과 몇몇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891년(진성여왕 5)에 건립된 개선사지석등(보물, 1963년 지정)의 명기(銘記)에는 ‘건립석등(建立石燈)’이라는 기록이 있고, 1093년(선종 10)에 건조한 나주 서성문 안 석등(보물, 1963년 지정)의 명기에는 ‘등감일좌석조(燈龕一座石造)라는 명문을 볼 수 있다.
또, 속리산 법주사사적에는 ’연등각 석사자 광명대 일좌 동철광명대 일좌(燃燈閣石獅子光明臺一座銅鐵光明臺一座)‘라 하여 연등각은 목조, 석사자는 석조, 동철광명대는 금속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 이래 석등이 건립되어왔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 · 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이것은 곧 불교 전래 이전의 능묘에는 석등을 세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석등이 불교에서 기원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상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뺄 수 없는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실시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도구의 하나이므로 일찍부터 제작되었다.
석등의 발생연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충청남도 부여의 가탑리폐사지(佳塔里廢寺址)에서 백제의 석등 대석(臺石)이 발견 조사된 바 있고,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백제석등의 옥개석(屋蓋石) · 화사석(火舍石) · 연화대석(蓮華臺石) 등의 부재가 발견 조사된 점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의 기본형은 하대석(下臺石) · 중대석(中臺石, 竿石 혹은 竿柱라고 함.) · 상대석(上臺石)을 기대(基臺)로 삼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 넣는 화사석과 옥개석을 얹으며, 정상부를 보주(寶珠) 등으로 장식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변화를 보이고 있어 시대적 또는 지방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등불이 장치된 화사석인데, 이제까지 조사된 백제시대 석등의 화사석은 평면이 8각이고 네 면에 화창구(火窓口)를 낸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백제시대 석등의 기본적인 8각형은 통일신라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국보, 1962년 지정)이 남아 있다.
이 석등은 8각의 전형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는데,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8각의 복련석(覆蓮石)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8각의 간주(竿柱)를 세웠으며, 다시 8각의 화사석을 받치기 위한 8각의 앙련석(仰蓮石)을 얹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옥개석 정상부에는 보주를 얹은 형식이다.
이 석등의 각 부재의 알맞은 비례는 매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화사석 네 면에 조각된 보살입상(菩薩立像)과 복련석의 모서리마다 귀꽃문양을 붙인 장식은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이러한 장식은 다른 몇 기의 통일신라시대 석등에서도 나타나는데, 그중에서 법주사사천왕석등(보물, 1963년 지정)에는 보살상 대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어 더욱 주목을 끈다.
또한 이 시대에는 특수한 형식으로 고복형(鼓腹形)이라 불리는 간주석의 형태가 있다. 이 형식은 특히 호남지방에서 유행하였다고 추측된다.
이 고복형 석등은 각 부재가 주로 8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전형양식의 석등과 다를 바가 없으나, 간주석의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굵은 마디를 두어 마치 ‘북’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석등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복련석 혹은 옥개석의 귀꽃이 특히 크게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화엄사각황전석등(국보, 1962년 지정)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클 뿐 아니라 장엄하고 대담한 걸작품이다.
이 밖에도 임실 진구사지 석등(보물, 1963년 지정)과 실상사 석등(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는데, 이 석등들에서 주목되는 점은 화창구가 화사석의 8면에 모두 뚫려 있는 것으로, 이것은 고복형 석등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상사석등에서는 등불을 밝히기 위한 층단형 석단(石壇)이 바로 앞에 놓여 있어 당시의 석등 점화방법을 엿보게 한다.
또한 개선사지석등에는 8각의 화사석에 조성연대가 오목새김되어 있어 891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절대연대가 밝혀진 석등은 드물다.
다음으로 형태가 이색적인 석등양식이 있는데, 이 형식은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만드는 석공들의 창의에 의하여 건조되는 각각 전혀 의장을 달리하는 수법을 보이게 된다.
그중에서도 중간에 간주 대신 사자 두 마리를 이용하는 기법, 즉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라고 불리는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였고, 이러한 형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법주사쌍사자석등(국보, 1962년 지정) · 중흥산성쌍사자석등(국보, 1962년 지정) · 영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1963년 지정)이 있다.
이 시대의 석등에 표현된 쌍사자는 모두 뒷발로 밑의 복련석에 버티고 마주서서 앞발을 들어 위로 앙련석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법주사석등에서는 장중함을, 중흥산성석등에서는 경쾌함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1963년 지정)을 들 수 있다. 이 석등에서는 두 마리의 사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으며, 윗부분의 부재도 사자가 직접 받치지 않고 쌍사자 사이를 한 단 높게 하여 받치고 있다.
사자석등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1963년 지정)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으나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보물, 1979년 지정)에서는 한 마리의 사자가 엎드려 있고, 그 등 위에 간주를 놓고 있다. 이것은 사자석등임은 분명하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약식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 특이한 석등의 한 예로는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앞 석등과 팔공산 부인사금당암지석등을 들 수 있다.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앞 석등은 각 면에 안상(眼象)을 조각한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복련석을 놓고 그 왼쪽 무릎을 세우고 왼손에 보주를 받치고 있는 승형(僧形)의 인물좌상을 안치하고, 그 위에 위쪽이 안으로 좁혀진 3개의 원형석주가 8각형 개석을 받치고 있다. 그 위의 상대석 · 화사석 · 옥개석 · 보주석 등은 모두 일반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대석 부분의 인물상은 마주하고 있는 사자석탑의 상층기단부 내에 인물상을 세운 데서 얻은 착안이라고 하겠으나, 석등에 인물상을 이용하는 수법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것이며, 밑이 넓고 위가 좁은 3개의 석주는 인물상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석등 자체에 안정감을 부여하여 특이한 시각적 효과를 보이고 있다.
부인사금당암지석등은 상하 각부가 8각형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정8각형이 아니고 대석과 간주로부터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8각 중 마주 대하는 2면만이 넓어진 편8각형(偏八角形)을 이루고 있어 전체 형태에 변화를 주고 있는 특수한 형식이다.
더구나 화사석이 하나의 돌로 된 전형적인 양식과는 달리 두 개의 화사석을 붙여서 두 곳에 등불을 밝히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예이다.
고려시대에 이르게 되면 초기에는 대체적으로 전 시대의 8각형의 전형을 계승하지만 석탑에서와 같이 전체 형태가 둔중해진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8각평면의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방형평면의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관촉사 석등(보물, 1963년 지정)과 현화사석등(玄化寺石燈)은 이러한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는 원형평면이고, 그 위에 4각형의 앙련석을 얹었으며, 화사석은 네 귀에 석주만을 세우고 방형의 옥개석을 덮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시대 석등에 남아 있는 예가 많으며, 조선시대에도 전해져서 초기에 건립된 회암사지쌍사자석등과 청룡사지사자석등(靑龍寺址獅子石燈)의 상대석 · 화사석 · 옥개석은 4각형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장명등(長明燈 : 능묘 앞에 설치하는 석등)이 등장하는데, 개성의 공민왕 현릉(玄陵) 앞 석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장명등을 설치하는 일은 조선시대의 능묘 경영에 계승되었고 형태도 사각형이 지속되었다.
이 밖에도 금강산의 정양사석등(正陽寺石燈)이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앞석등(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石燈)과 같이 6각형의 양식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석탑의 양식에 있어서도 4각형을 기본으로 삼았던 신라시대의 양식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다각형(多角形)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석등은 모두 4각형 평면이 기본형식이고, 간주는 우리나라 석등형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길고 가는 형태 대신에 짧고 두툼한 형태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이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1963년 지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석등의 간주형태는 전체적으로 위축 퇴화되고 화사석은 장대하여졌으며 전면에는 장식성이 농후해졌는데, 특히 이러한 대석의 형태는 조선시대의 장명등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대는 복련을 두르고 간주는 넓고 얇아지며 8면의 모서리마다 연주문(連珠文)을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로 새겼다. 또, 각 면에는 안상을 오목새김하고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기단부의 형상은 바로 조선시대의 장명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