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탑으로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석가탑은 동탑인 다보탑(多寶塔)에 대칭되는 호칭이다.
이러한 호칭은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나란히 앉아 하나는 설법하고 하나는 증명하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이요,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다.
그러나 이 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는 1024년(현종 15)에 불국사 무구정광탑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인데, 1038년(정종 4)에 다시 옮겨 적은 것으로, 이 탑(혹은 다보탑)을 무구정광탑으로 지칭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불국사의 두 탑이 석가탑이나 다보탑으로 불려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해서 석가탑 창건을 751년으로 보았으나, 묵서지편에서 나온 두 종류의 중수기 기록으로 다보탑과 석가탑 모두 대성각간(大城角干)의 주도하에 불국사 쌍탑으로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창건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 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는 10.4m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큰 돌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설치되어 있는데, 상하 기단은 각각 여러 개의 석재로 짜여 있다.
하층기단은 기대(基臺)에 높직한 굽이 돌려져 있고, 중석(中石)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 2주씩이 각 면에 모각(模刻)되어 있다. 갑석(甲石)은 4매로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활모양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보다 높고 우주와 탱주가 2주씩 있다. 갑석에는 밑에 부연(副椽: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약간의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각형의 2단 탑신(塔身) 굄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층 탑신에는 4개의 우주가 있다. 각 층 옥개석은 조성수법과 형태가 같다. 옥개받침은 5단씩이고 위에는 각형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평평하고 얇으며 4면의 합각(合閣)은 예리하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았으나 1973년에 실상사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의 상륜부를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연꽃을 조각한 탑구(塔區)가 있는데, 이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 한다. 이것은 탑의 정역(淨域)을 구별한 것으로, 연꽃 1송이에 1보살씩 8보살의 정좌라고도 하고, 또는 석탑에 직접 조각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팔방금강좌는 특별한 착상인 동시에 탑의 장엄을 한층 더하여 주는 희귀한 유구(遺構)로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한 훼손사건이 발생하여 손상됨에 따라 1966년 10월에 탑신부의 해체수리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해 12월에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탑신의 상면 중앙에 있는 네모난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와 각종 장엄구(莊嚴具)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이 다라니경은 당나라의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를 사용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서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1967년 국보로 일괄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또한 이 탑에는 백제의 공인(工人)인 아사달과 그를 찾아온 부인 아사녀의 애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도 알맞고 극히 안정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목조탑파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 초기의 석탑에서 발전하여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정형(定型)을 확립하였다. 이후 건립되는 우리나라 석탑들은 대부분 이 석가탑을 모범으로 삼아 건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