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과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 조선시대, 전문 기술관을 뽑는 과거 시험.
이칭
이칭
잡업(雜業)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고려 전기
공포 시기
고려 전기
시행 시기
고려시대
폐지 시기
조선시대
시행처
고려 정부|조선 정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잡과는 고려·조선시대 전문 기술관을 뽑는 과거 시험이다. 고려의 잡업은 명법업·명산업·명서업·의업·주금업·복업·지리업·하론업·삼례업·삼전업·정요업 등이었는데, 대체로 서인 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의 잡과는 역·의·음양·율의 4과였다. 조선시대의 잡과는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설행(設行)되었고, 초시·복시 두 차례의 시험만 있었으며, 합격자에게는 백패를 주었다. 조선의 잡과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천시되어 대부분 기술관의 자제나 향리·교생·서얼·양가 자제들만이 응시하였다.

정의
고려 · 조선시대, 전문 기술관을 뽑는 과거 시험.
제정 목적

고려시대의 잡업(雜業)은 '잡과(雜科)'라고도 하는데, 전문 기술관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 시험이었다. 잡업의 종류로 명법업(明法業) · 명산업(明算業) · 명서업(明書業) · 의업(醫業) · 주금업(呪暆業) · 복업(卜業) · 지리업(地理業) · 하론업(何論業) · 삼례업(三禮業) · 삼전업(三傳業) · 정요업(政要業) 등이 있었다. 고려에서는 문예와 유교 경전에 능한 인재를 선발하는 양대업(兩大業)인 제술업(製述業)명경업(明經業)이 과거 고시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기술관을 뽑는 잡업은 경시되었다. 잡업은 대체로 서인 이상이면 응시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양대업에 비해 신분적인 제약이 적었다.

내용 및 변천 사항

고려시대 잡과는 향공시(鄕貢試) 등의 초시(初試)와 잡업감시(雜業監試)를 거쳐 동당잡업(東堂雜業)의 단계로 실시되었다. 각각의 담당 관서에서 잡과의 예비 시험과 교육을 담당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에 9회의 잡과 시험에서 81명을 뽑은 기록만이 남아 있어서 정확한 선발 인원이나 규모는 알 수 없다.

잡업 가운데에는 중국의 과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과목으로 잡업에서 출제한 참고서 목록이 『고려사』 「선거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중국 과학사에서도 일찍이 일서화(逸書化) 된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중국의 과학 기술 서적을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잘 보존하였음을 보여 준다.

1392년(태조 1)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문음(門蔭)과 문무과 이외에 잡과로서 이과(吏科) · 역과(譯科) · 의과(醫科) · 음양과(陰陽科) 등 4과가 있었다. 이과 이외에 이문과(吏文科)도 잠시 실시된 적이 있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이 두 과 대신 율과(律科)가 첨가되어 역 · 의 · 음양 · 율의 4과가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의 잡과는 식년시(式年試)증광시(增廣試)에만 시행되었고, 초시 · 복시(覆試) 두 차례의 시험만 있었으며 전시(殿試)는 없었다. 식년 잡과의 초시는 상식년(上式年) 가을에 해당 아문의 주관 아래 시행되었고, 복시는 각 아문과 예조가 주관하였다. 시험 과목은 전문서(專門書) · 경서(經書) ·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필수 과목으로 하였다. 각 과목은 통(通) · 약(略) · 조(粗)로 채점하는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여 분 수가 많은 자를 선발하였다.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다가 뒤에 백패(白牌)로 바꾸었다. 그런데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에게 주는 백패에는 국보(國寶)를 찍었으나, 잡과의 백패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 주었다.

잡과 출신자들은 각 아문의 권지(權知)로 임명되었는데 역과 1등은 본아문 종7품계를, 2등은 종8품계를, 3등은 종9품계를 받았으며, 다른 잡과의 1등은 종8품계를, 2등은 정9품계를, 3등은 종9품계를 받았다. 이미 품계를 가진 자는 1계를 더해 주되, 가자(加資)한 품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때에는 거기에 1계를 더 올려 주었다. 그리고 이들 잡과 합격자들은 합격하지 못한 자들보다 훨씬 우대를 받았다. 일례로 잡과 출신자라야 참상계(參上階)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의금부(義禁府)에서 치죄할 때 태(笞) · 장(杖)을 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잡과에는 잡학생도(雜學生徒) · 전함기술관(前銜技術官) 및 7품 이하 관리로서 기술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문과는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생원진사시는 정5품 통덕랑(通德郎) 이하만이 응시하도록 한 데 비해, 잡과에는 7품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잡과가 문과나 생원진사시보다 경시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양반 자제들은 잡과를 천시하여 응시하지 않았고, 대체로 기술관의 자제나 향리(鄕吏) · 교생(校生) · 서얼 · 양가 자제들만이 응시하게 되었다.

의의 및 평가

향리들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잡과에 합격하면 향역(鄕役)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교생이나 양가 자제들은 잡과를 통해 중인(中人)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으므로 잡과는 하나의 신분 이동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술직은 점차로 기술관들에게 세습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경국대전(經國大典)』

단행본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일지사, 1990)
박용운, 『『고려사』 선거지 역주』(경인문화사, 2012)
허흥식,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일조각, 1981)

논문

이성무,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혜암 유홍렬박사 화갑기념논총』, 탐구당, 1971)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