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성과(謁聖科)라고도 한다. 국왕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에게 급제를 주는 것으로, 1414년(태종 14)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알성시에는 문과와 무과의 두 과만 있었다. 알성문과는 다른 시험과는 달리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었으며, 국왕의 친림 하에 거행되던 친림과(親臨科)의 하나였다. 알성문과는 시험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고시 시간이 극히 짧아 응시자들이 충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시관은 과차(科次)에 정밀을 기할 수 없었다.
또, 즉일방방(卽日放榜)하여 시관의 수도 다른 전시(殿試)에 비해 훨씬 많았다.『속대전( 續大典)』에는 그 시관의 수를 독권관(讀卷官) 10인, 대독관(對讀官) 20인으로 정하고 있다. 과목은 매우 간단해 책(策)·표(表)·전(箋)·잠(箴)·송(頌)·제(制)·조(詔) 중의 1편으로 하였다. 그러나 과차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과 같은 것은 피하고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인 표를 많이 출제하였다.
국초에는 성균관 유생과 3품 이하의 조사(朝士)에게만 응시 자격을 주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권학적(勸學的)인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뒤에는 성균관 유생을 시취한다는 특명이 없는 한 지방 유생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다.
알성문과는 친림과인 까닭에 상피제(相避制)가 없어 시관의 아들이나 친척도 응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후세에는 시관의 협잡이 심하였다. 알성무과는 초시(初試)와 전시(殿試)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초시는 두 곳의 시험 장소에서 각각 50인을 선발하고, 전시에서 국왕의 친림 하에 시취하였다. 합격 인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고시 과목에는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과녁[貫革]·격구(擊毬)·기창(騎槍)·조총(鳥銃)·편추(鞭芻)·강서(講書)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