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통일신라시대 788년(원성왕 4)부터 시행된 관인 선발 제도이다.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부르며,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제도로 여겨진다. 기존에 관인을 뽑을 때 화랑도 활동에서 특출한 사람이나 활쏘기와 같은 재주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으나, 독서삼품과를 시행함으로써 시험을 통해 한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관리로 선발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과거제 내지 과거의 시원적 형태로 이해되고 있으나,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주된 관리 등용 방법으로 시행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통일신라 하대의 관인 선발 방식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하며, 원성왕이 처음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4년(788) 봄조에 이 제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혹은 『 예기(禮記)』, 『 문선(文選)』을 읽고 그 뜻에 능통하면서 아울러 『 논어(論語)』와 『 효경(孝經)』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곡례(曲禮)』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으로,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선정하여 관리로 삼았다. 또 5경(五經)과 3사(三史),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저서에 널리 통달한 사람이라면 등급을 뛰어넘어 뽑아 등용하도록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지(상) 국학조에 국학(國學)의 교육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구분하여 학업으로 삼았다. 박사(博士)와 조교(助敎) 1명이 때로는 『예기』, 『주역』, 『논어』, 『효경』을, 때로는 『춘추좌전(春秋左傳)』, 『모시』, 『논어』, 『효경』을, 때로는 『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르쳤다.”
이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국학에서 교육에 사용되는 책들의 대부분이 독서삼품과에서 다루는 도서들임을 알 수 있다. 또 직관지(상)에는 바로 위에 언급한 교육 내용에 뒤이어, “모든 학생이 책을 읽고 3품으로 관직에 나아갔다[出身].”고 하면서, 본기에 있는 독서삼품과의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적고 있다.
국학의 교육 내용과 독서삼품과에서 다루는 도서가 거의 일치하고, 또 직관지(상)에서 국학조에 독서삼품과의 내용이 들어 있어서, 독서삼품과는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과 연계된 제도일 수 있다. 이에 독서삼품과를 국학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졸업시험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독서삼품과에서 다루는 서적과 국학의 교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국학의 교재 중 『주역』, 『상서』, 『모시』는 독서삼품과에서 다루는 책 목록에는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독서삼품을 국학의 졸업시험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독서삼품과를 국학의 졸업시험으로 보는 입장은, 독서삼품에 지원할 수 있는 대상을 국학생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이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제도 시행 이듬해인 789년(원성왕 5)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楊根縣) 소수(少守)로 임명하려고 할 때, 모초(毛肖)가 자옥은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지방관직을 맡길 수 없다고 논박하는 기사이다.
국학생이 아니었던 자옥이 출사할 수 없다는 언급을 통해, 독서삼품과가 국학생에 한정되어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국학 졸업생의 관등이 5두품(頭品)이 승진할 수 있는 상한인 대나마(大奈麻)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6두품 신분층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달리 국학생이나 6두품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국학의 교육 내용과 독서삼품이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학의 교육 내용보다 오히려 수준이 낮은 점을 볼 때, 국학생은 물론 개인적으로 유학을 습득하였던 사람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적용되었고, 신분적으로도 진골에서 4두품에 이르는 여러 계층이 응시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한편 독서삼품을 통해 임명되는 관직은 자옥의 사례에서 볼 때 주로 지방관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위직을 독점하던 진골들은 독서삼품으로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으며, 중앙관직은 독서삼품을 통해 임명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서삼품과가 통상적이고 전면적인 관인 선발제도라고 보기 힘들며, 그렇기에 이를 과거제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통일신라 하대에 이르러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국학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 결과 관인 선발제도로서의 독서삼품과의 중요성과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