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詞章)은 문장(文章)과 시부(詩賦)를 통칭하는 국문학용어이다. 사장(辭章)이라고도 한다. 한·당나라의 시와 당·송나라의 고문을 모범으로 하고 수사적 기교에 중점을 둔 장식적 문학론에 충실한 것이 특징이다. 성리학·도학(경학)의 상대적인 명칭으로 사장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사장이 중요시되었으나 주자학 전래 이후 신진 유학자들이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 학풍 전환을 시도했다. 조선초까지만 해도 사림파와의 갈등 속에서 훈구관료파가 사장학을 옹호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학문의 운명을 좌우하면서 사장학·사장파는 점차 그 입지를 잃게 되었다.
주로 한당시(漢唐詩)와 당송고문(唐宋古文)을 모범으로 하고 수사적 기교에 중점을 둔 장식적인 문학론에 충실했다. 후대에는 시문 · 잡문 등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성리학 · 도학의 상대적인 명칭으로 사장학이라 불렀다. 사림파의 상대적인 명칭으로 사장파라 불리기도 하였다.
사장이 문학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고려 후기에 무신란을 계기로 당시 지식인들이 문사에 힘쓰면서부터이다. 충선왕이 이제현(李齊賢)에게 “지금 공부하는 자들이 대부분 승려들을 추종해서 장구만 익히는 풍조 때문에 조충전각지도(雕蟲篆刻之徒 : 글구만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무리들)만 번창하고 경명행수지사(經明行修之士 : 경전을 익히고 훌륭한 행실을 닦는 선비)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 원인은 어디 있는가.”라고 한 것은 당시의 사장학 중심의 학문적 풍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
공부하는 자들이 승려를 추종한 까닭은 무신란에 이어 문신에 대한 무도한 살육을 피해 산사로 도주하여 중이 된 학자들에게 지방의 자제들이 찾아가서 수학하였던 일이 관습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이제현은 이에 대해 학교를 개설하여 오륜을 밝히는 참교육을 실시하면, 장구나 학습하는 폐단을 쇄신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 조준(趙浚)이 “지금의 학자들은 사장만을 숭상하여 다행히 과거에 합격하면 한 몸의 영화를 취하는 것으로 만족을 느낍니다. 벼슬에 종사한 후에는 배운 바를 모두 버리며, 일 처리에 어두워 국가의 유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 뜻을 저버립니다. 지금부터 각 식년에 급제한 4품 이하의 관원을 불러 전정(殿庭)에서 책문에 응하게 하소서.합격한 자는 제교를 맡게 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는 좌천시켜 유풍을 흥기시키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조준이 말한 내용을 보면 사장을 숭상하는 풍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과거제의 변혁을 통해서 문풍을 쇄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서도 성간(成侃)은 「성균관기(成均館記)」에서 “사장의 학으로서 인륜이 전하여져 밝혀지지 못하였으니, 동물과 다른 것이 거의 드물다.”라고 하였다. 권근(權近)은 「개주성 북쪽에서 자면서 옛일을 생각하다[宿開州城北懷古]」라는 작품에서 “문덕(文德)만이 진실로 태평에 이를 수 있지, 사장 따위로 어떻게 망한 나라 구할건고.”라고 하였다. 그들은 앞시대의 사장학을 맹렬히 공격하고 조선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의 유학의 진작을 기도하였다.
고려시대의 사대부들은 경학보다는 사장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새로운 학풍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신진유학자들은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 학풍을 전환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은 학풍의 전환을 위해서는 과거의 시험과목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강경(講經)에 의한 인재의 선발을 주장하였다.
경학보다는 사장을 중요시하던 학풍이 경학 중심으로 전환시키려는 과정에서 과거의 과목을 바꾸는 데에 따른 대립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었다. 과거과목을 강경으로 하느냐 혹은 제술(製述)로 하느냐 하는 것은 과거의 등락을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경서의 본문을 제시하고 경의(經義)나 의난(意難)한 곳을 풀이하는 논설식 시험방법인 제술은 문장의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서오경의 내용을 시관과 시험생이 면대하여 그 대의와 지취를 물어보는 강경은 유학적 조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림파들의 공격화살은 사장과 함께 인재등용의 관문인 과거제에 집중되었다. 사림들이 인재등용에 대하여 계속 문제 삼은 것은 사장으로 입신하는 관료세력의 진출을 막고 자기들의 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사장 자체에 대한 비판 역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사장을 무용한 것 내지 유해한 것으로 몰아세움으로써 문한(文翰:문필에 관한 일)으로 화직(華職:높고 화려한 관직)을 점유하고 영광을 누리는 관료들의 날개를 떨어뜨린 셈이었다.
사장학은 주자학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16세기 신진사림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나, 사장론은 대개 집권층과 연결되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가장 득세한 논리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 ‘가지와 잎과 꽃이 없이 뿌리와 줄기만으로 나무가 설 수 없듯이 문장이 없이 도덕만으로는 안 된다.’라는 이론이 실질적으로 유행하였다. 그리고 ‘문장은 관료정치에 필요한 수단일 뿐더러 크게는 왕정을 밝히고 국조를 빛낼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사장옹호론이 중심적으로 유행하였다. 관청의 문서기록, 명(明)나라 사신의 접대 등을 위해 한시(漢詩)와 한문의 문장을 잘 짓는 문사(文士)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초시의 삼장(三場), 복시의 중종장(中終場), 전시(殿試)는 모두 사장 중심의 제술시험을 보도록 규정했고, 문신의 경우 매달 몇 수(首)의 한시와 문장을 짓게 했음. 이로 인해 관학파(官學派)의 학자 · 관료들은 사장학 중시의 학풍을 이루고 현실 긍정의 자세에서 관료적 문학이 풍미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훈구관료파에 의해 사장학이 주도되었다가 사림파의 성리학과 대립양상을 보였다. 조선 전기의 사장학에 대한 비판으로 사장학이 한때 주춤하였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본조가 개국한 이래로 사장학을 다 폐했는데, 1438년(세종 20)에 비로소 진사과를 두고, 시험에 사부를 쓰니, 이로부터 시학이 크게 이루어졌다. 모두 두 선생( 조수趙須, 유방선柳芳善)이 남긴 가르침의 힘이었다.”라는 내용을 기록한 것을 보면 다시 사장학이 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때에 도학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趙光祖) 일파에 대하여 최부(崔溥) · 남효온(南孝溫) · 이주(李胄) · 김일손(金馹孫) · 조위(曺偉) · 남곤(南袞) 등이 사장파로서 시부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남곤 등이 물러나고 사림파가 학문의 우이(牛耳)를 잡았다., 그 이후에는 사실상 사장학 · 사장파는 더 이상의 입지를 잃어 버렸던 것이다. 이 논쟁은 중앙의 귀족화한 훈구관료 세력과 지방에서 새로이 진출한 사림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이해될 것이다.
도학 쪽의 공격에 대하여 사장 쪽은 이론적으로 매우 허약하였다. 주자학적 이념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장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사장을 도의 위로 올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되는 엄청난 변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도의 종속적인 지위에 있거나 아니면 도에 병합되어야 했다.
도학 진영에서 사장을 도에 폐해를 끼치는 것으로 규정하고 나올 때,에 사장은 도학이 근본이지만 지엽인 문도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절충론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장에 치중한 관료적 문학은 일단 역사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무릇 사장으로 사람을 채택하는 것은 이미 인재를 등용하는 뜻에 어긋났다. 또 사(私)를 두어 이리저리 결탁하므로 무식한 무리들이 판을 친다. 옛 도는 비록 회복하기 어려우나 만약 사장으로 진출한 자들을 조준의 법대로 발탁하고 도태시킨다면 거의 개정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는 “지금에도 또한 호걸스럽고 뜻이 있는 선비가 있다. 그러나 과거 공부 때문에 내 몸을 사장에 맡기고 내 생명을 과거에 건다. 그리고 고생하여 과거에 합격한 뒤에는 다시 경서를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전의 사장도 모두 포기하여 丁(정)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같이 된다.”라고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말했다.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에서 문예로 사람을 뽑는 것을 말세의 폐습이라 하고 기송과 사장을 옛 사람들은 이단에 견주었다고 한 것을 보면 사장학이 입지를 잃은 지 오래이고 사장이라는 말은 과거시험에 국한된 정도의 축소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사장이라는 용어는 문장이라는 용어의 대용으로 겸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육용정(陸用鼎)의 「논사장(論詞章)」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양상을 잘 살필 수 있다. 사장을 논한다고 제목에서 말했으나, 그 내용은 문장학 전반에 걸친 포괄적 내용을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