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금고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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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서얼금고법은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첩을 두는 풍조가 만연했는데, 여러 처 소생 간의 상속 분쟁을 불러와 유교적 일부일처제 기준에 따라 제재를 받았다. 첩의 신분이 천인인 천첩이 압도적으로 많아 첩과 그 소생에 대한 천시 관념도 작용했다. 하지만 서얼 중에 도학·행의·문장·충의 등에 뛰어난 자들이 많아 차별폐지를 위한 서얼허통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다. 서얼허통은 정조 때 큰 진전을 보았고 1894년의 갑오경장 때 공·사 노비 제도가 혁파됨으로써 차별 대우가 근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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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
내용

이 제도는 1415년(태종 15)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태종의 특정한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살펴 종친(宗親) 및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顯官)의 직사를 맡기지 말자고 건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해 몇 가지 형태의 차별이 가해지던 끝에 『경국대전』 편찬 이후로 금고의 제재가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의 규정은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죄를 범해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등과 함께 문과, 생원 ·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이전(吏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문 · 무 2품 이상의 양첩(良妾) 자손은 정3품, 천첩(賤妾) 자손은 정5품에 한하고,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 자손은 정6품에 한하며,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까지의 양첩 자손은 정5품, 천첩 자손은 정7품에, 양첩자의 천첩 자손은 정8품에 각각 한정해 서용한다고 한 것 등이다. 이 두 규정은 같은 차별 의식의 소산이나 성립의 내력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제정된 시기는 전자보다 후자가 앞섰다.

서얼에 대한 한품 규정의 동기는 기술관에 대한 것과 거의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내력과 경위는 훨씬 더 복잡하였다. 고려시대는 상급 신분층 사이에 대체로 일부일처제가 준행되었으나, 말기에 접어들면서 처를 여러 명 거느리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이 변화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몽고 풍습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 증식 정책이 강구되는 가운데 다산이 미덕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에서 풍습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든 이러한 풍조는 조선왕조 성립 후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갱신되는 가운데 여러 처의 소생간의 상속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심각한 문제로 부수되어 유교적인 일처주의 기준 아래 제재를 받았다.

일처주의는 한 사람의 처 외는 모두 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다처간의 적(嫡) · 첩 구별의 분쟁은 대단히 심각했으며, 그 분쟁의 치열함 속에서 첩에 대한 적대 관념이 이미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더해 처음부터 첩으로 맞아들여진 자 가운데 신분이 천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 첩 및 그 소생에 대한 차별 의식 조장을 결정짓게 하였다.

고려 말 이래 다처 풍조 아래서 처음부터 첩으로 맞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신분이 양인인 양첩도 있었지만, 신분이 천인인 천첩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기 소유의 비(婢)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태반으로, 첩과 그 소생에 대한 천시 관념은 여기에서 비롯됨이 가장 컸다.

천첩 소생에 대한 처우는 양천제(良賤制)의 신분 규정의 적용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관행에 따르면,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노비신분이면 그 소생의 신분은 종모법(從母法)의 원칙에 따라 노비, 곧 천인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는 국가의 역(役)을 담당할 인력의 확대를 목적으로 공사비(公私婢) 신분으로 양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소생은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이른바 종부법(從父法)이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1414년(태종 14)에 채택되었다.

이 법의 제정으로 양반의 천첩 소생이 양인이 되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차별적 처우는 여기서부터 구체적으로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종부법의 적용으로 양인신분을 허용하더라도 천인 소생에 대한 차별 관념은 그대로 남아 양인으로서의 활동에 일정한 제재가 가해졌다.

즉, 양인 남자면 누구나 담당해야 하는 군역의 의무가 보충군(補充軍)이라는 특별한 병종에 일정한 기간 복무할 것이 요구되고, 한품 서용의 규정을 마련해 이 군역을 치른 뒤에 밟게 되는 벼슬길에 제한을 두었다.

과거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규정의 제정 시기는 기록상 확실하지 않다. 단지, 같은 제재의 대상인 재가실행 부녀의 자손에 대한 차별의 논의가 1477년(성종 8)에 있었으므로 대개 이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전부터 있어 온 한품 서용의 규정도 그 대상직을 잡직으로 한정해 서얼이 좋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렇지만, 이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입법으로 차별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서얼 출신인 어숙권(魚叔權)『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서얼에게 아예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경국대전』 편찬 후라고 지적하였다. 어숙권이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주해』에도 그러한 강화된 차별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서얼 자손에 대한 법의 적용이 자자손손으로 해석되고, 서얼 자체에 대한 해석도 양첩산은 서, 천첩산은 얼이라고 구분하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특히, 얼은 죄를 범해 몰패된 여자가 요행히 고귀한 남자를 만나 자식을 낳으면 나무를 베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하여 차별 의식이 당시 대단히 경색화된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경국대전주해』가 만들어진 시기를 전후해서 서얼 출신의 명사는 적지 않았다. 어숙권을 비롯해 조신(曺伸) · 송익필(宋翼弼) · 양사언(楊士彦) · 양대박(梁大樸) 등 도학 · 행의 · 문장 · 충의 등에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許通論者)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李珥)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서얼로서 6진 일대의 근무를 지원하는 자는 3년만에 허통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직접 채택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예를 낳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심해 광해군 때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하여 박응서(朴應犀) 등 서얼 출신 7인이 관련된 역모 혐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서얼허통에 관한 조정의 논의는 인조 · 현종 · 숙종 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통의 실적은 1597년(선조 30)부터 1735년(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서얼들의 집단상소가 자주 있었다. 1695년(숙종 21) 영남 지방 서얼 988명, 1724년(영조 즉위년) 정진교(鄭震僑) 등 5,000인이 각각 상소한 것이 유명하다. 영조는 1772년 서얼을 청요직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얼들의 서열을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서치법(序齒法)을 적용하고, 서얼도 일반 양반과 마찬가지로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문제 등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청요직 가운데 서얼을 위해 가장령(假掌令) · 가지평(假持平) 각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서얼허통 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다. 정조는 영조대 조정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1777년(정조 1) 3월에 이른바 정유절목(丁酉節目)을 통해 서얼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혔다.

즉, 문반의 분관(分館)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이전과 같이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부천(部薦)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 · 형조 · 공조의 참상, 음직으로는 판관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에서는 문무당하관으로 부사, 당상관으로 목사를 허용하고, 음직으로 생원 · 진사 출신자는 군수를 허용해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로 승진시키며, 생원 · 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을 허용해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예문관에 한정해 직강 이하직은 제한없이 처리하며, 무신은 중추부 · 오위장 등을 제한없이 하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 · 무의 여러 관직에 대한 진출의 허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조는 1779년 내각, 곧 규장각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학식있는 서얼들을 다수 이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득공(柳得恭) ·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 · 서이수(徐理修) 등은 4검서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치를 도운 이른바 초계(抄啓) 문신신 가운데도 서얼 출신들이 다수였다.

1823년(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癸未節目)이 마련되어 좌윤 · 우윤, 호조 · 형조의 참의, 병사 · 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집단적인 상소는 1848년(헌종 14)과 1851년(철종 2)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서 적 · 첩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녀(寡女)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공 · 사 노비 제도를 혁파함으로써 서얼 차별대우의 깊은 뿌리가 잘려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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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금고시말(庶孼禁錮始末)」(이상백, 『동방학지』 1, 1954 ; 『이상백저작집』 Ⅲ, 1978)
「칠서지옥(七庶之獄)」(이상백, 『이병도박사회갑기념논총,』 1956 ; 『이상백저작집』 Ⅲ, 1978)
「서얼차대고(庶孼差待考)-선초첩자한품서용제(鮮初妾子限品敍用制) 성립과정을 중심으로-」(이태진, 『역사학보』 27, 1965)
「庶孼考」(前間恭作, 『朝鮮學報』 5·6, 1953·1954)
「19세기 서얼소통운동에 대하여」(이종일, 『한국사연구』 58, 1987)
「조선후기 서얼허통」(배재홍, 『경북사학』 10, 1987)
「조선후기 적서신분변동」(嫡庶身分變動)에 대하여(이종일, 『한국사연구』 65, 1987)
집필자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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