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박(梁大樸)은 1543년(중종 38) 남원(南原)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사진(士眞)이고, 호는 송악(松岳) · 청계도인(靑溪道人)이다.
시문(詩文)으로 유명하여 당대의 재능으로 불렸다.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칭해졌던 이달(李達) ‧ 백광훈(白光勳) ‧ 임제(林悌) 등과 자주 어울리며 시회(詩會)를 열었다. 양대박의 시는 허균(許筠)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직접 지어 보관하였던 시가 원래 1천여 수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00여 수 만 남았다.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교류할 때에는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를 좋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자 직접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 담양(潭陽)에서 만나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다. 여러 고을의 선비들과 무예에 익숙한 100여 명이 의병에 합류하자 두 아들과 가동(家僮) 50명을 포함해 부대를 구성하였다. 전투에 필요한 무기와 군량 등을 모두 자신의 사재로 충당하였다.
담양에서 고경명과 합류한 뒤, 그를 맹주로 추대해서 대장의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부대를 출발시켜 전주로 이동하면서 의병을 계속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동 중 운암(雲巖)에서 일본군을 만나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의병을 모으기 위해 더위와 굶주림을 참아가며 고생하다가 병을 얻게 되었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쉽게 치료가 되지 않아 수레에 실려 돌아왔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양대박은 전공과 절의를 인정받아 정조 대 정문(旌門)을 하사받았고,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소에 따라 병조참의(兵曹參議)에서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정조 재위기 동안 계속 증직되다가 1796년(정조 20) 8월에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 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로 확정되었다. 당시 정조는 양대박의 공적을 고경명에 비견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