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미수(眉壽), 호는 한벽당(寒碧堂). 세거지(世居地)는 전라남도 강진(康津)과 영암(靈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설사(典設司) 별검(別檢)을 지낸 곽무정(郭茂貞, 14691535), 할아버지는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낸 곽간(郭玕, 14971567)이고,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낸 곽세공(郭世功, 1525~1608)이다. 어머니는 강진조씨(康津趙氏)로 현감(縣監)을 지낸 조세규(趙世圭)의 딸이다. 부인은 선산김씨(善山金氏) 만호(萬戶) 김선경(金善慶)의 딸이다. 아들 곽치요(郭致堯)는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을 지냈고, 손자 곽성구(郭聖龜)는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와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증손자 곽제화(郭齊華)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대간직(臺諫職)을 수행하였다.
1549년(명종 4) 태어났다. 1579년(선조 12)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583년 별시(別試)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조좌랑과 부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외아들이었고 효심이 깊었기 때문에 항상 부모 봉양을 우려하였다. 1596년 부안현감으로 재직할 때 부모 모두 70여 세에 이르자 관직에서 물러나 부모 봉양에 힘썼다. 이후 관직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나서 있던 기간이 대략 30여 년이었다. 이 기간 두문불출하면서 시문학과 글공부에 정진했고, 특히 『주역(周易)』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역』을 암송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까지 할 정도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1616년(광해군 8)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손들이 그의 시문(詩文)을 모아 1930년 『한벽당집(寒碧堂集)』을 간행하였다. 문집 안에 국·한문 혼용시 「만흥삼결(漫興三闋)」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서 그의 저술로 기록된 『안택지(安宅誌)』 및 『사방해(四方解)』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