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사경(朴思敬), 할아버지는 박침(朴忱)이다. 아버지는 박강생(朴剛生),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승경(尹承慶)의 딸이다.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승순(韓承舜)의 딸이다. 박의문(朴疑問), 박절문(朴切問)이 형이고, 박원충(朴元忠)이 아들이다.
1408년(태종 8) 출생하였다. 1436년(세종 18) 친시(親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거쳐 1445년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평안도판관(平安道判官)과 종사관(從事官) 등을 역임하였다.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였다가 실패하고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그의 구체적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박규수가 지었던 「충정공박심문신도비명(忠貞朴公審問神道碑銘)」과 가문의 후손들이 지었던 『청재박선생충절록(淸齋朴先生忠節錄)』이다. 박팽년 · 성삼문 등 육신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던 중 의주에서 이들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사망 기록이,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된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