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진(朴叔蓁)은 1424년(세종 6) 태어났다.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정지(挺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문길(朴文吉),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박순(朴淳), 아버지는 증(贈) 병조판서 박흔(朴昕)이다. 어머니 천안전씨(天安全氏)는 전경(全卿)의 딸이다.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예빈시윤(禮賓寺尹)을 지낸 김치지(金致知)의 딸이다. 동생으로는 박숙무(朴叔楙) · 박숙달(朴叔達) · 박숙창(朴叔暢)이 있다.
1447년 식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급제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55년(세조 1) 권지정자(權知正字)로 있으면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는 동안 업무에 실수가 있어 사헌부에 탄핵되어 파직되었지만 두 달 정도 후에 다시 서용되었다. 1465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있으면서 『경국육전(經國六典)』을 수교(讎校)할 때 「병전(兵典)」의 교정을 담당하였다. 이 작업은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1470년(성종 1) 사은사(謝恩使) 김국광(金國光), 정난종(鄭蘭宗)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사행을 다녀왔다. 이후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군기시정(軍器寺正),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승지직을 차례대로 역임한 후 1478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2개월 후에는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계속해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대사헌으로 있는 동안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를 계속 상소하다가 성종의 명에 따라 의금부(義禁府)의 추국(推鞫)을 당하였다. 이 문제 때문에 체직을 당하였지만 바로 서용되었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제수받고 외직으로 나아갔다. 1481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