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 생원 · 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 대교 ·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 ·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좌부승지 · 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 · 호조참판 · 한성부판윤 ·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 · 우참찬 · 이조판서 · 공조판서 ·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난종은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조맹부체(趙孟頫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 · 성종 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원각경』의 자체가 고르지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파고다공원의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 「윤자운묘표」, 연산(連山)의 「김철산비(金鐵山碑)」가 있다.
또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奉先寺鐘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은 보기 어려우며, 『동국명필(東國名筆)』 · 『해동명적(海東名跡)』 ·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