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립(金誠立)은 1562년(명종 17)에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견(汝見) 또는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노(金魯), 할아버지는 김홍도(金弘道)이다. 아버지 김첨(金瞻)은 홍문관교리(行弘文館校理), 경연시독관(兼經筵侍讀官), 혜민서교수(惠民署敎授) 등을 지냈다. 어머니는 판서를 지냈던 은진송씨(恩津宋氏)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아내는 조선 전기의 여성 문인으로 유명했던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이다. 후일 홍씨(洪氏)와 재혼하였는데 홍세찬(洪世贊)의 딸이다. 동생은 김정립(金正立)이다. 아들은 김진(金振)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589년 문과 증광시 때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글을 잘 지어 당시 문명으로 유명하였다. 장인 허엽(許曄)은 본인을 비롯해 자녀 4남매의 문장이 모두 뛰어나 당시 사람들에게 허씨오문장(許氏五文章: 허엽 · 허성 · 허봉 · 허난설헌 · 허균)이라 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엽의 사위 김성립과 우성전(禹性傳)도 문장으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은 허씨 가문이 가장 세력이 크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허균(許筠)은 김성립이 누이 허난설헌의 인물이나 학문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허균의 평가 때문에 김성립은 후대에 천재 아내를 둔 옹졸한 남편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김성립 역시 당대에 문장으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의기(意氣)를 지닌 인물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1세에 의병으로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시신을 찾지 못해 옷으로만 장례를 치렀던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