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선조 22) 발생하였던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연루자 심문 과정에서 사건의 주동자도 제시되었던 인물이 길삼봉이다. 사건 발생 후 정여립(鄭汝立)은 아들 정옥남(鄭玉男), 변숭복(邊崇福) 등과 함께 진안(鎭安)의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현감(縣監) 민인백(閔仁伯)에게 잡혔다.
이 과정에서 정여립은 변숭복을 먼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옥남은 박춘룡(朴春龍) 등과 함께 궁궐로 압송되었다. 당시 선조는 정옥남을 친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길삼봉이 주도자로 처음 언급되었다. 1590년에도 길삼봉이 나주(羅州) 사람 임지(林地), 승려 성희(性熙) 등과 함께 송광사(松廣寺) 삼일암(三日庵)에 머물면서 반란을 모의하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기축옥사 당시의 공초 과정에서 길삼봉에 관한 진술이 상충되는 사례가 계속 나타났으며, 실제 이름이 길삼봉이 아니라 최삼봉(崔三峯)이라던 증언도 있었다. 길삼봉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증언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길삼봉을 잡기 위해 지리산 지역을 수색하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최영경(崔永慶)은 정여립 사건 당시 길삼봉(吉三峯)으로 억울하게 몰려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대간들은 정철(鄭澈) 등이 최영경을 길삼봉으로 무고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탄핵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