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은 조선전기 『난설헌집』을 저술한 시인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나 1589년(선조 22)에 사망했다. 허균의 누이로, 문장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오빠·동생의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원만치 않은 부부생활,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고독한 삶을 보내며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임종 때의 유언에 따라 작품은 모두 소각되었는데,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건넨 작품 일부가 그녀의 사후 중국에서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신선세계를 동경하는 내용의 작품이 절반 이상이다.
허난설헌은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과 동생 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균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李達)에게 한시 수업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조선사회의 모순과 계속 닥쳐온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세상을 떠나 신선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은 시가 128수나 된다. 현실에서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탈현실의 천상 세계와 신선의 삶을 동경하면서 그런 세계를 허구화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널리 알려진 시로는 둘째 오라버니 허봉을 갑산으로 유배 보내는 안타까움을 읊은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이 있고, 강가 집에서 독서하는 서방님께 부치는 시로 「기부독서강사(寄夫讀書江舍)」, 죽은 자식을 향해 통곡하는 시로 「곡자(哭子)」, 감정을 삭이고 싶어서 지은 시로 「견흥(遣興)」, 가난한 집 처녀를 위한 노래 「빈녀음(貧女吟)」 3수 등이 있다.
국한문가사로는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종 때 그의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됐다고 전한다.
한편, 동생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었고 주지번의 찬사를 받아 중국으로 전파되어 1606년(선조 39) 그녀가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면서 조선조 대표적 여류시인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그녀가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한편,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인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해 일본 열도에서도 애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