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문신으로 문장에 능하였고, 시를 잘 지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해서 1479년(성종 10) 통신사행의 군관(軍官)으로 참여하여 일본에 건너가 이름을 알렸다. 주요 저서로는 1518년(중종 13) 왕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편찬한 『이륜행실도』를 비롯하여 『적암시고』, 『소문쇄록』, 『백년록』 등이 있다.
조신(曺伸, 1454~1529)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서 얼자(孼子)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매형이다. 어려서부터 형인 조위(曺偉)와 함께 시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김종직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문학적 재능을 길렀다. 그는 중국어 · 일본어에 능하였으므로 자신의 신분과 재능을 살려 역관의 길을 걸었다.
조신은 김종직, 김안국(金安國), 남효온(南孝溫), 정여창(鄭汝昌), 박상(朴祥), 이행(李荇), 권민수(權敏手), 이항(李恒), 홍언필(洪彦弼) 등 당대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빼어난 문장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교 문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이에 성종은 여러 차례 조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학문을 논하면서 상을 주었다.
1479년(성종 10)에 내시 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같은 해에 통신사 군관(通信使軍官)에 선발되어 통신사행의 역관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통신사행은 정사 이형원(李亨元) · 부사 이계동(李季仝) · 서장관 김흔(金訢) 등이 파견되었는데, 이 사행은 일본 국내의 병란(兵亂)과 정사 이형원의 사망으로 결국 교토[京都]까지 가지 못하고 쓰시마[對馬]에서 중지되었다.
한편 조신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중국에 가기도 하였다. 중국 사행 당시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 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외교적 공적이 인정되어 종3품의 사역원 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1485년(성종 16)에는 의사(醫司)에 속하여 음양의 이치와 약리(藥理)를 가르쳤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내의원(內醫院)에 출사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조신이 학식이 깊고 음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유자광(柳子光)과 성현(成俔)은 성종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고 조위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 있다.
1518년(중종 13) 왕의 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고, 이밖의 저서로 『적암시고(適庵詩稿)』, 『백년록(百年錄)』, 『소문쇄록(謏聞瑣錄)』 등이 있다.
1543년(중종 38)에 ‘문장에 능한 사람을 우대하는 뜻’으로 서출이자 역관인 그에게 공조판서를 추증하였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