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5년(효종 6) 에도막부[江戶幕府] 바쿠후의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 16411680)의 쇼군직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통신사의 정사로 선발된 조형(趙珩, 16061679)이 일본에 다녀오며 기록한 일기이다.
일기는 1655년(효종 6) 4월 20일 조형 일행이 한양을 출발한 때부터 시작되며, 에도에서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인 2월 1일 쓰시마[對馬]의 장수원(長壽院)에 머문 날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형 일행은 10월 3일 에도[江戶]에 도착해 8일 국서를 전달하는 의식인 전명의(傳命儀)를 행하였으며, 에도에 체류 도중인 10월 14일 닛코[日光]로 출발해서 18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사당인 도쇼구[東照宮]에서 효종의 어필(御筆)을 전달하고 21일 다시 에도로 돌아와 곧이어 귀국길에 올랐다.
『부상일기(扶桑日記)』는 1655년(효종 6) 을미 통신사의 정사였던 조형이 일본 사행 중 일기를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이후 1711년(숙종 37) 신묘 통신사의 정사로 파견된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이 사행에 참고하기 위해 조형의 증손인 조경명(趙景命)에게 빌려 휴대하였다. 사행 중 조태억은 일본에 남아있던 조형의 유묵을 수습하여 말미에 덧붙였다. 이후 1913년 서울에서 『부상일기』 진본을 입수한 이마니시 기마타[今西龜滿太]가 책 뒤에 일본어 설명을 덧붙여 넣었다. 다시 1917년 고이즈미 데이조[小泉貞造]가 이마니시 기마타에게 원본을 빌려 필사하였다.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26×18㎝이며, 총 10행 20자이다. 본문은 86장이며, 부록은 31장이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현전하는 『부상일기』는 2종으로 알려져 있다. 1종은 진본으로, 이마니시 기마타의 후손을 통해 임동권에게 전해졌다가 현재 그의 아들 임장혁이 소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1종은 고이즈미 데이조의 필사본으로,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상일기』는 조선인의 기록과 일본인의 부기로 나눌 수 있다. 1655년(효종 6) 4월 20일 한양을 출발해 에도에 갔다가 귀국길에 1656년 2월 1일 쓰시마에서 머물 때까지 2년여에 걸친 기간 동안 조형의 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어서 1711년(숙종 37) 통신사행 당시 조태억이 일본 사행 중 수습한 조형의 시 7수가 실려 있고, 조태억의 서문과 시 1수가 함께 실려 있다.
일본인의 부기에는 이마니시 기마타가 1655년 사행 당시에 만났던 일본의 유명한 문사들 및 1711년 통신사의 정사 조태억, 1655년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조형과 함께 일본에 갔던 남용익(南龍翼) 등의 생애, 그리고 이들을 접대했던 하야시[林] 집안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13년 이마니시 기마타가 『부상일기』의 진본을 손에 넣은 후 직접 부기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에는 고이즈미 데이조가 조태억의 서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과 『부상일기』를 필사한 내력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통신사 일행 중 정사의 입장에서 사행 과정을 기록한 사행록이라는 점에서 통신사 연구뿐만 아니라 17세기 중반 한일관계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충분하다. 뒷부분에 일본인의 부기 역시 통신사 기록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 어떻게 입수되고 이해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