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의 난은 1467년(세조 13)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함길도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지역 출신 호족을 관리에 임명하였는데, 세조의 집권책으로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자 북도 호족들의 불만을 샀다. 이시애는 고향인 길주에서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가진 호족과 도민을 선동하고 조직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약 4개월 동안 이어졌으나 이시애가 반란군에 잠입한 허유례(許惟禮)에 의해 체포되고 구성군(龜城君) 준(浚)에 의해 참형을 받으며 끝났다. 반란을 진압한 세조는 집권책을 가속화하였으며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었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土班)이었다.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원래 함길도는 조선의 왕실 발상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집권책은 북도인의 불만을 샀다.
호패법(號牌法)을 더욱 강화해 지방민의 이주를 금하자 북도의 호족들은 그들의 세력 아래 있는 백성들이 본고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해 불만이 누적되었다. 이시애는 불만에 찬 북도의 호족이나 도민의 세력을 집약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조직화하고 민심을 선동하였다.
즉, 그의 아우 시합(施合) 등과 더불어 “하삼도(下三道) 군병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다. 충청도 군병이 배를 타고 경성 · 후라도(厚羅島)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어 설한령(薛罕嶺, 雪寒嶺)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자기 쪽으로 이끌면서, 1467년 5월초에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베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강효문을 살해한 그는 길주목사 설정신(薛丁新, 澄新), 부령부사 김익수(金益壽) 등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모두 살해하는 동시에,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 · 신숙주(申叔舟) 등의 중신과 결탁해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함길도민에게는 이시애가 세조의 뜻을 받들어 중앙의 여러 중신과 결탁한 반신(叛臣)을 정벌해 평정하였다고 속여 그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소식을 접한 세조는 조정 중신이 관련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일단 이들을 대궐 안에 구금시키는 동시에 반란 정토조를 편성하였다.
즉,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함길 · 강원 · 평안 · 황해의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로, 허종(許琮)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康純) · 어유소(魚有沼) · 남이(南怡) 등을 대장으로 삼아 6도군사 3만명으로 절도사의 근거지인 함흥을 향해 출발하도록 했다.
이시애는 길주로부터 단천 · 북청 ·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그곳 관장을 모두 죽이고 자기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면서 함흥을 점령해 관찰사 신면(申㴐)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이와 같이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구성군 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나아갔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세조는 다시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鎭北大將)으로 삼아 평안도병 3,000명을 주어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삼아 황해도병 500명을 주어 문천(文川)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경병(京兵) 1,000명을 주어 구성군을 돕게 하였다.
구성군은 5월 15일에야 겨우 회양(淮陽)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세조는 각종 효유문(曉諭文)을 내려 보내는 동시에 반군 일당의 체포에 현상(懸賞)까지 하였다. 6월 1일 체찰사 윤자운이 이시애 진영에서 탈출해오자 구성군은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들어가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에 대한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그 동안에도 이시애는 때로 20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마곡역(麻谷驛)에 나오기도 하고, 이시합은 홍원의 하탄동에 나와 한때 갑사 출신인 차운혁(車云革)에게 사로잡히기도 하였으나 거짓 속임수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당시 반군은 함흥, 관군은 영흥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세조는 효유문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던 정책을 거두고, 궐내에 금고했던 신숙주 등의 중신을 풀어주는 동시에,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을 강구하였다. 이시애는 이같은 세조의 강경책에 당황해 북청을 거쳐 이성(利城 : 利原) 다보동에 근거를 두었다가 다시 북청으로 나와 근거지로 삼았다.
이시애의 후퇴로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原)을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 · 산개(山介)의 양령(兩嶺)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강순은 이에 따라 박중선 · 허종 · 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 진을 쳤다.
이시애는 6월 19일 북청을 비워 후퇴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졸을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시키는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야인(野人)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 어소(於所)로 나아가 관군을 협격하려 하였다.
관군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북청으로 진격해 들어갔으나 이시애군은 없고 도리어 포위되는 결과가 되었다. 강순은 마침내 김교(金嶠)의 건의에 따라 목책(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鹿角)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감(坑坎)을 파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6월 24일 밤 4고(四鼓)에 이시애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강순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문을 굳게 닫아 공격을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북도 사람을 시켜 대의(大義)로써 이시애군을 효유하니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시애는 10여회나 싸움을 걸었으나 관군의 북청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관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아가 자수(自首)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북청에서 패퇴한 이시애군은 다시 군세를 정비하였다. 즉, 7월 14일 그의 사위인 이명효(李明孝)로 하여금 홍원 · 북청 · 갑산 · 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탕구령(湯口嶺)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申翌坪)에 주둔해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 자신은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大門嶺)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펴고 관군의 자멸을 기다렸다.
한편, 관군은 북청에 있는 군사를 홍원으로 후퇴시켜 1 · 2 · 3진으로 나누어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시애는 이 틈을 타서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에도 관군은 효유에 나섰으나 이시애가 듣지 않으니 관군은 무작정 효유를 수반한 장기전을 펼 수 없었다. 7월 25일 관군은 한밤중에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해 진북장군 강순의 1진으로 산개령을 넘게 하고, 2진 대장 어유소로 종개령을 넘게 해 북청으로 진입하게 하는 동시에 구성군은 평포로 나아갔다. 관군은 산개 · 종개령의 적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시키니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명이었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 : 訖嶺)으로 나아갔다. 만령은 남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태산을 등지고 있어 관군과의 전투에는 유리한 지점이었다. 관군은 다시 만령 공격에 나섰다. 강순의 1진이 먼저 만령 밑에 도착하고 어유소의 2진을 기다렸다가 7월 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구성군과 강순 · 박중선 등의 군사는 큰길로 나아가고, 허종 등은 큰길 남쪽 중봉(中峰)으로 나아갔다. 우공(禹貢)은 큰길 중봉, 그리고 어유소는 바닷가와 동령(東嶺)으로, 김교 등은 북산(北山) 밑으로 나아가 각각 만령을 향해 4면에서 포위, 진격하여 이시애군의 선봉진인 만령 주봉(主峯)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시애가 있는 중봉으로 공격해 갔다.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2,000여기의 팽배대(彭排隊)를 3중으로 포열하고 결사적으로 버텼다. 때마침 유시(酉時)에 이르러 만령 동봉에서 어유소가 소식을 듣고 중봉으로 나아가 이시애군의 좌측 허를 찔러 방어선의 일각을 통과함으로써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패퇴시켰다. 결국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 이튿날인 8월 1일 관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해 이성으로 들어가니 그들은 객사 · 창고 등을 불사르고 다시 북으로 패주하였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관군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쳐서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패주하여 길주로 달아났다. 관군은 8월 12일 이시애군을 쫓아 단천을 탈환하고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에 이르렀다. 이 때 이시애는 허종 휘하의 허유례(許惟禮)의 계교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
즉, 허유례는 그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항복하는 체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李珠) · 이운로(李雲露) · 황생(晃生)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시애는 8월 12일 구성군 준에 의해 참형에 처해져 효수되었으며, 이로써 약 4개월에 걸친 난은 끝이 났다.
이시애는 세조의 강력한 집권체제 확립에 대한 지방민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같이 해 그들을 단결시키고, 자신이 일으킨 난을 의거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등 세조의 집권책에 반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난이 진정됨에 따라 세조의 집권책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난을 계기로 북도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 · 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던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