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쪽은 동해, 서쪽은 북청군, 북쪽은 단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8°26′∼128°47′, 북위 40°11′∼40°26′에 위치하며, 면적 447㎢, 인구 6만 4457명(1943년 현재)이다. 1개 읍 3개 면 78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이원면 교동리이다.
북쪽 단천군과의 경계에는 함경산맥의 여맥이 뻗어 내려 취덕산(鷲德山, 1,001m)·성령(城嶺, 542m)·작봉(鵲峯, 870m)·마운령(摩雲嶺, 418m) 등이, 서남쪽으로 북청군과의 경계에 영덕산(嶺德山, 1,408m)·궐령(蕨嶺)·만령(蔓嶺) 등이 솟아 있다.
북서 산악 지대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이 군역의 중앙부를 흘러 동해로 들어가는데,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이 평야는 군의 주요 생산 지대이며, 또한 거주 지역이 된다.
동대천(東大川)이 취덕산에서 발원하여 대평·청동을 거쳐 용암과 창평을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해안선은 총연장 56㎞에 불과하지만 차호반도·이원만이 형성되어 있고, 전초도(全椒島)·작도(鵲島)·난도(卵島)·소도(小島) 등의 섬이 있다.
기후는 대체로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그러나 겨울에는 북서부의 산악들이 대륙 방면에서 불어오는 북서 계절풍을 막아 주고 또 연안을 흐르는 해류의 영향을 받아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보다 매우 온화하다.
연평균 기온 9.5℃, 1월 평균 기온 4.5℃, 8월 평균 기온 23.2℃이며, 연 강수량은 647㎜로 우리 나라 평균 연 강수량의 3분의 2밖에 안 된다.
따라서, 벼농사에는 미흡하나 밭농사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다. 첫얼음은 10월 29일경에 얼기 시작하여 다음해 4월 3일경에 녹고, 첫서리는 10월 17일경에 내려 다음해 4월 5일경에 끝난다.
[고 대]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웃 북청군 속후면 강상리에서 신석기 시대의 포함층·토기·석기 등이 발굴되었고, 북청군 이속면 중리, 신창읍 토성리, 속후면 강상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포함층·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이 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옥저 시대부터인데, 이 군은 남옥저에 속하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옥저는 태조왕 때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므로 고구려의 군현이 설치되었겠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신라진흥왕의 북진정책으로 그 세력이 함경남도에 미쳤을 때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마운령비(摩雲嶺碑)를 동면 용산리에 있는 마운령에 세웠다. 통일신라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한 발해가 평안도와 함경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므로 이 군은 발해에 편입되어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지금의 북청)에 속하여 있었다.
[고 려]
태조는 개국 후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920년(태조 3) 유금필(庾黔弼)을 안변 방면의 골암진(鶻巖鎭)에 파견하여 북번(北蕃)을 회유 또는 토벌함으로써 안변·영흥 지방이 고려에 편입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이곳까지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다.
1258년(고종 45) 11월 몽고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자 이 군도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356년(공민왕 5)화주를 수복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혁파하고, 그곳에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면서부터 함경남도 지방이 대부분 수복되어 이 군에도 군현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옛 이름은 시리(時利)라고 하여 공양왕 때 복주(福州:지금의 단천)에 속하여 있었다.
[조 선]
1436년(세종 18)단천군 마운령 이남의 시질간사(時叱間社)·시리사(施利社) 및 북청부 동다보사(東多甫社) 이북의 땅을 떼어 이성현(利城縣)을 설치하였는데, 이처럼 독립된 현으로 승격된 것은 세종의 진취적인 동북경 개척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원은 현감·훈도 각 1인이고, 군사 체계는 북청진관에 속하여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1인이 있어 현감이 겸임하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하였을 때 이성도 점령되어 막심한 전화를 입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행정구역은 시질간사·시리사·다보사 등으로 나뉘어 있었고 호구는 2,085호 1만 3609명이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선조어휘(先祖御諱)의 자음(字音)을 피하기 위하여 이성현을 이원현으로 고쳤다.
[근 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이원읍지』에 의하면 호구는 2,152호 1만 6309명으로 약간 증가하고 있다. 1895년 부군제를 실시할 때 이원현은 군으로 승격되어 함흥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함경남도 이원군이 되었다. 1927년 호구는 8,539호 4만 8033명이었고, 1943년에는 1만 1267호 6만 4457명으로 1871년보다 현저히 증가하였다.
1928년 9월 함경선이 완공되었고, 차호선(증산∼차호)·철산선(나흥∼이원철산) 등 산업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이원철산(利原鐵山)의 개발, 차호항의 건설 등에 의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구의 집산이 많았다.
3·1운동 때 천도교도 김병준(金秉濬)·공시우(孔時祐)·박승룡(朴承龍) 등이 주동하여 3월 10일 이원읍 시장에서 1,0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인 것을 비롯하여 각 면에서 수차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집회 횟수 3회, 사망자 5명, 부상자 11명이었다.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이원군 군감으로 강현수(姜賢秀), 참사로는 김병준이 임명되었다. 독립 운동가로는 1919년 11월 상해임시정부의 밀령으로 의친왕이강(李堈)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강석룡(姜錫龍, 일명 泰東), 이 군 출신 김성렬(金成烈) 등과 함께 비밀결사 홍익청년단(弘益靑年團)을 조직,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히고, 1925년 서울폭탄사건에도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강면하(姜冕夏, 宰豪로 개명), 광복군 군사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언도받았던 강진건(姜鎭乾) 등이 있다.
「선풍 시대 旋風時代」 등 다수의 문학 작품을 발표한 한인택(韓仁澤), 정치가 정중섭(鄭重燮), 1920년 필리핀극동올림픽대회 1만m 육상에서 우승한 유장춘(柳長春) 등이 이 군 출신이다.
동면 용산리 단천군과의 경계인 정봉(井峰) 산정에 대부분 붕괴된 둘레 약 620m인 석성이 있고, 동면 용암리성치(城峙) 정상에 대부분 파괴된 둘레 약 240m의 석성지가 있으며, 동면 대평리에도 둘레 약 550m인 산성지가 남아 있다.
남송면 율지리와 각종리 산 정상에 450m의 석성곽 240m의 석성지가 대부분 파괴된 채 남아 있고, 동면 대평리성평치(城坪峙)에 남이산성(南怡山城), 고암리에 시질간산성(時叱間山城) 등이 있다.
동면 용산리의 신라 진흥왕 마운령순수비는 현재 함흥본궁본관으로 이전, 보관되어 있다. 불교 유적으로 동면 용산리만덕산에 있는 복흥사(福興寺)는 18세기 중엽에 창건된 사찰이며, 복흥사칠층석탑도 복흥사 창건 때 건립된 석탑으로 2중기단에 탑신의 비례는 신라 전형 양식 석탑의 비례와는 맞지 않는 조선 시대 석탑이다. 또, 이원면 원전리영덕산에 정광사(定光寺)가 있다.
이 밖에 군청사 동남 구릉에 호호정(浩浩亭)이 있고, 이원읍에 남송정(南松亭), 동면 용산리에 어필각(御筆閣), 문성리에 기암군(奇巖群)인 학사대(學士臺) 등이 있다.
옛 교육기관으로는 1438년(세종 20) 이원면 교동리에 향교가 건립되었는데, 관원으로 현감 1인과 훈도 1인이 있었다. 그 뒤 17세기 말엽 향교가 개수되고, 또 개편되면서 서당 공부를 하던 많은 청소년들이 이곳에 뽑혀 와서 경학을 공부하고 규범을 배웠다. 향교가 정부 주도의 교육기관인 반면 민간의 교육기관으로 서원이 있었다.
남송면 율지리에 율지서원(栗枝書院)이 있었고, 동면 효우리에 1860년에 건립된 율계서사(栗溪書祠)가 있었다. 개화기에 들어서부터는 이 지방에도 개화사상이 팽배하여 신교육기관이 신설되고 일찍부터 유학생이 속출하였다.
1921년 통계에 의하면 이 군 출신의 일본 유학 및 서울 유학생 수가 88명으로 함경남도에서 으뜸이라 할 만큼 교육열이 높았다.
당시 신교육기관으로는 이 군 교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보명학교(普明學校)가 1910년 이전에 이미 세워졌고, 그 뒤를 이어 각처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조선교육령」이 공포됨에 따라 군내의 학교들이 공립보통학교와 사립학교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912년 군립 보명학교는 이원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고, 1917년에는 차호·보성학교도 차호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 1932년에는 사립 진명학교도 군선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1면1교제의 공립보통학교가 설치되었다.
종교 상황을 보면, 불교가 이 군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진흥왕 때부터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이유는 진흥왕의 북방 순수비 가운데 마운령비가 세워진 무렵에 정광사나 복흥사·보성암(寶盛庵) 등이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07년 이원면 문평리 문창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종훈(李鍾薰)이 교회를 설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며, 그 뒤 여러 명의 목사와 장로가 배출되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호호정과 예별루」·「남송정」·「학사대」·「적벽강」·「난도」·「천마의 울음」·「풀무골 정승」 등이 있다. 이 중 「천마의 울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호읍 포항리 천마산에는 나라에 좋고 궂은일이 있을 때마다 자정에 천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경술년 국치일과 8·15광복 때에는 이 소리가 들려서 천지가 개벽할 때가 왔다고 노인들은 이야기하였다.
어느 해에는 장마가 들어 이 산에 산사태가 났는데, 그해에 이 군에는 전염병이 퍼져 많은 생명을 잃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 천마봉에 든 액운의 소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 뒤부터 이 산에다 마을에서 해마다 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풀무골 정승」은 군의 북쪽에 있는 곡구의 뒷골인 풀무골에 얽힌 이야기이다. 오봉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중턱에 펼쳐진 봉우리가 있는데, 여기를 천리행룡만리안대(千里行龍萬里岸對)의 복치형으로 된 명당이라고 한다. 그 지세가 천 리를 나는 비룡이 끝없는 바다 저편의 기슭을 굽어보는 씩씩한 위세를 보이는 형세라는 것이다.
어느 때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청나라 노성팔이라는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하도 산세가 좋아서 그곳에 있는 묘소에 참배한 다음 무덤의 주인을 찾았다. 주인이 곡구에 있는 김해 김씨임을 알고 그 종갓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는 늙은 내외와 여덟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노장군은 여덟 형제를 다 만나 보았다.
그중 일곱째 아들과 막내아들을 보고는 “이 아이들은 소국에 살아서 성장하게 되면 장차 대국에 화가 많이 미칠 것이다.” 하며 일곱째 아들과 막내아들을 데리고 청나라로 들어갔다.
그 뒤 노장군은 자식이 없어서 그들을 자식으로 입적하였다. 그들은 성장하여 한결같이 승상 품격인 ‘일광도 월광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장족바위 인연」·「장수바위」·「장가샘」 등이 전한다. 이 고장은 앞이 바다요 뒤는 농터이기 때문에 농사요나 어요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민요로는 「명태바룰요」·「애원성」·「제비요」·「각씨요」 등을 들 수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는 겨울의 윷놀이와 널뛰기, 봄·가을의 그네뛰기와 씨름은 다른 고장과 비슷하나, 특히 해안의 경치가 유명한 이 고장에는 남달리 여름의 남송정놀이·전초도놀이·대은암화전놀이·군선화전놀이가 있다.
동제는 여제(厲祭)만을 지내는데 1월·3월·7월·9월 일몰 시에 지낸다. 제단은 마을 동쪽의 평지에 만드는데, 약 200평이나 되는 넓은 곳으로 적송나무가 수령이 200여 년이나 된 노송숲이다.
신단을 축성하고 신당을 지으며, 그 안에는 산신·선왕신상의 영정을 걸어 놓는다. 제물은 마을 공동으로 돼지를 잡고, 집집마다 떡·채소·생선 등을 준비하여 제물 한 상씩 차려와 각각 돼지고기를 분배한 뒤 제단에 진설하여 제를 지낸다.
축문은 여제축이며, 반드시 고축하는데, 어느 축문보다 대단히 간절하고 사실적이다. 예를 들면 “우리 촌락은 바닷가 한구석에 한 읍이지만 명소요 팔면으로 승지인데, 사·농·공·상 함께 모여 이웃이 되고, 수십 성씨들이 기백 가족을 이루었으니 원컨대 질병 없고 복상 없도록 하옵시고…….”와 같다.
주민의 약 60%가 농업에 종사하며, 논과 밭의 경작면적 비율은 약 1:5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콩·감자·보리·밀·조·대마 등이 생산된다.
동해 앞바다는 세계적인 대어장으로 수산업이 발달되어 명태·대구·청어·연어·고등어 등의 어획이 많다. 1926년경 한때는 정어리가 많이 잡혀 전국을 놀라게 한 일도 있다. 명태는 그 품질이 전국에서도 유명하며, 국내는 물론 만주·일본 등지에 대량으로 수출된다.
이러한 어획물을 원료로 하여 명란·간유·성게젓 등의 수산물 가공업이 도처에서 성황을 이룬다. 특히, 미역·다시마·가리비·방어는 예로부터 이곳의 명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중 미역은 조선 시대 진상품이 되었다.
연안에는 예로부터 7진(津)·8암(巖)의 고을이라 할 만큼 차호(遮湖)·군선(群仙)을 비롯하여 홍진(洪津)·유진(楡津)·포진(浦津)·애진(愛津)·방진(防津)·장진(長津)·사진(沙津) 등의 여러 어항이 있다.
광공업으로는 철광이 으뜸이며, 맨돌[球石]·규석(硅石) 등도 채광된다. 한때는 곱돌광[滑石鑛]이 성황을 이루었으나 폐광되었다.
차호읍 창흥리에는 동양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적철광이 1000만 톤 가량 매장된 이원철광이 있으며, 이곳에 이원제철소와 이연특수제강공장(理硏特殊製鋼工場)이 있다. 철광석은 차호항을 통하여 각지로 운송된다.
임업도 활발한 편으로 산지대에는 활엽수가 많고, 평야 지대에는 적송림이 있다. 임산물로 송이버섯·송엽·목탄·소나무 등과 여러 가지 약재가 채취된다.
상업 활동은 주로 공설 정기 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원읍장이 이원면 남문리에서 매일 개장되며, 이원가축장이 이원면 남문리에서 4·9일에, 차호장(遮湖場)이 차호읍 하차호리에서 5·10일에, 군선장(群仙場)이 동면 상선리에서 매일 개장되며, 용암장이 동면 용암리에서 3·8일에 개장된다. 그러나 교역도 하지만 사교 활동에 더 의미를 띠고 장에 모인다.
교통망은 이원면을 중심으로 1·2등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며, 각 면 소재지로는 대개 등외도로가 통한다. 함경선이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는데, 남단의 나흥역(羅興驛)에서 북단의 곡구역(谷口驛)까지 7개소의 역이 설치되어 이 군 교통의 대간선이 된다.
지선으로는 이원철산선과 1916년 역시 철광 수송을 위하여 부설된 차호선이 있다. 1941년 개통된 이덕령 임산선은 북청·풍산·갑산 방면과 통하여 이 군의 교통을 한층 편리하게 해 준다.
연안에는 차호항과 군선항이 있어 해로 교통 역시 편리하다. 명승지로는 이원팔경에 속하는 전초도·학사대·적벽강(赤壁崗)·남송정·복흥사·망경루·호호정·정광사를 비롯하여 대은암·군선항·차호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차호읍遮湖邑]
군의 남단에 위치한 읍. 인구 2만 3503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상차호리이다. 1941년 행정구역 개편 시 남면에서 분할되어 차호읍으로 승격되었다. 서남단에 만령이 있으며, 동부와 남부가 동해에 면한 항구도시이다. 차호항은 가로막고 있는 전초도 안쪽 깊숙이 위치한 천연의 양항이다.
산업으로 특기할 것은 이 읍의 성장 요인인 이원철광의 개발이다. 매장량 1000만 톤에 52%라는 고품질의 적철광이 매장된 이원철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철도가 부설되면서 읍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18년 창흥리의 철광 채굴이 시작된 이래 연간 17만 톤의 광석이 철도편으로 차호역까지 수송된 뒤 선편으로 일본 제철소로 반출되었다.
광업 다음으로는 수산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연해어업이 활발하며, 명태·정어리·고등어 등이 많이 잡히는데,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읍민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교통은 원산∼회령 간의 국도가 함경선과 병행하며 중앙을 종단할 뿐 아니라 함경선에서 갈라져 부설된 철산선·차호선이 있어 편리하다. 차호항은 깊은 수심에 물결이 잔잔하여 1만 톤급의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으며, 연안 항로의 좋은 기항지 구실을 한다.
명승지로는 이원팔경의 하나인 전초도를 비롯하여 적벽강 등이 있다. 상차호(上遮湖)·하차호(下遮湖)·용항(龍項)·유진(楡津)·유성(楡城)·포항(浦項)·포진(浦津)·창흥(昌興) 등 8개 이가 있다.
[남송면南松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8,50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염분리이다. 1941년 행정구역 개편 시 남면에서 분할되어 남송면으로 되었다.
서쪽 경계에 응봉·화항령 등 높은 산이 있는 반면 동쪽은 동해에 면하여 서고동저의 지형을 이룬다. 동북부는 남대천의 하류 지역으로 광대하며 비옥한 이원평야가 전개된다.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활발하며, 쌀·콩·조·보리·피·감자 등이 생산된다.
동쪽 해안 지대에서는 수산업도 활발히 행하여져 명태·대구·정어리·고등어 등이 많이 잡힌다. 증산리에서는 한때 곱돌광업이 활발하였으나 지금은 폐광 상태이다. 교통은 해안선을 따라 함경선과 원산∼회령 간의 국도가 병행하여 달리며 증산·염분·송단역이 있다.
경승지로 용성리 해안가에 남송정이 있는데 백사장 10여 리 간에 노송이 우거져 여름에는 낙원을 이룬다. 이 소나무숲은 1583년(선조 16) 현감이 방풍림으로 식수하여 잘 보전한 것으로 동해의 맑은 물과 잘 어우러져 이곳 일대는 해수욕장으로 이름나 있다. 장동리에는 1758년(영조 34) 창건된 보성사(寶城寺)가 있다.
염분(鹽盆)·안시(安市)·수항(壽巷)·율지(栗枝)·덕성(德城)·문호(文湖)·용성(龍成)·송단(松端)·중흥(仲興)·용원(龍源)·선분(仙盆)·증산(曾山)·각종(角宗)·원평(原坪)·창성(昌城)·풍성(豐城)·장동(長洞)·장성(長城) 등 18개 이가 있다.
[동면東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971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선리이다. 북쪽 경계에는 취덕산·작봉이, 동쪽 경계에는 마운령이 있으며, 남쪽은 동해에 접하여 지형상 북고남저의 완경사면을 이룬다. 취덕산에서 발원한 동대천이 남동류하여 동해로 유입하는데, 그 유역에 평야가 형성되어 주민들의 주된 생활 무대로 이용된다.
농업을 주로 하며, 일부 해안 지역에서는 수산업을 겸한다. 밭농사가 중심을 이루어 콩·조·보리·피·감자 등이 주로 생산된다. 수산업이 발달하였으며, 명태·대구·정어리 등의 어획고가 높다. 서남부에 있는 군선항은 농수산물의 반출 및 주요 항구 간의 교역항 역할을 한다.
한편, 가축을 사육하는 농가가 다른 지역보다 많은 편으로, 소를 비롯하여 말·돼지·닭 등을 부업으로 사육한다. 용암리 용암장은 예로부터 이름난 큰 시장으로 콩·연어·직물·소 등이 주로 거래된다.
교통은 동해안을 따라 함경선과 원산∼회령 간의 국도가 나란히 달리며, 여기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도로가 북쪽으로 연결된다. 군선항은 해상 교통의 요지이다.
고적으로는 고암리에 시질간산성, 대평리에 남이산성, 용산리구덕산에 운시산성(雲施山城)이 있다. 또, 용산리에는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가 있었는데, 현재 함흥 본궁 본관으로 이전, 보관되어 있다. 그 아래 남쪽에는 복흥사가 있으며, 문성리 동대천 하구에는 학사대라는 기암군이 있다.
상선(上仙)·대화(大禾)·대흥(大興)·좌역(左驛)·청곡(淸谷)·대평(大坪)·의덕(儀德)·청동(淸洞)·용산(龍山)·용평(龍坪)·창평(昌坪)·관서(館西)·관동(館東)·장원(長遠)·문성(文星)·용암(龍巖)·고암(古巖)·쌍암(雙巖)·효우(孝友)·신풍(新豐)·동류정(東柳亭)·와자(瓦字)·장문(場門)·양평(楊坪)·위계(渭溪)·방축(防築)·하선(下仙) 등 27개 이가 있다.
[이원면利原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100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교동리이다. 본래 서면이었던 지역으로 1941년 행정구역 개편 시 이원면으로 개칭되었다.
북쪽과 서쪽 경계에 이덕령·궐령·영덕산 등의 높은 산이 있다. 면의 중앙을 동남 방향으로 남대천이 흐르며 중류 이하에서 비교적 광대한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농업을 주로 하며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중심이다. 쌀·콩·조·보리·피·감자 등이 생산되며, 부업으로 양봉도 행하여진다. 서부 산지에는 노송의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1936년 남대천의 제방 공사가 진행되어 하류유역의 약 1,500정보의 전답이 홍수 방지와 관개 수리의 혜택을 받아 농업 생산이 안정되었다. 남문리에서 개장되는 이원장은 예로부터 으뜸가는 장으로 쌀·소·일용품 등이 주로 거래된다.
교통은 동남부 지역으로 함경선과 원산∼회령 간의 국도가 지나며, 다시 여기서부터 주요 도로가 갈라져 나와 남대천 계곡을 따라 서부의 궐령을 넘어 북청으로 통한다. 명승지로는 이덕리에 있는 대은암과 계곡을 들 수 있다. 원전리영덕산에는 838년(민애왕 1)에 창건된 정광사가 있다.
교동(校洞)·남문(南門)·서문(西門)·용포(龍浦)·용흥(龍興)·봉현(鳳峴)·대오(大吾)·북문(北門)·소하전(小荷田)·대하전(大荷田)·한당(閑堂)·하류정(下柳亭)·송로대(松老臺)·송강(松江)·송산(松山)·성동(城洞)·앙시동(仰時洞)·문평(文坪)·이덕(梨德)·문동(文東)·원동(院洞)·원천(院川)·원상(院上)·원전(院前)·아당(阿堂) 등 25개 이가 있다.
1952년 12월 면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이 단위로 분할, 통폐합하여 군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1954년 10월 오일리와 차호노동자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중평리에 편입시켰으며, 오일리의 일부로 나흥노동자구를 신설하였다. 경포노동자구를 차호노동자구에 편입시켰다. 1974년 단천군의 기암리·용흥리·원산리를 편입시켰다. 1982년 10월 용흥리와 원산리를 폐지하였다.
함경남도 북동부 해안에 있으며, 북쪽은 단천시, 서쪽과 서남쪽은 덕성군·북청군과 접하여 있고, 동쪽과 남쪽은 동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8°24′∼128°51′, 북위 40°10′∼40°27′에 위치하며, 면적 약 443.3㎢, 인구는 10만 8600여 명이다.
행정구역은 이원읍과 나흥(羅興)·차호(遮湖) 2개노동자구, 장축(場築)·청산(淸山)·대덕(大德)·성곡(城谷)·풍암(豊巖)·학사대(學士臺)·곡구(谷口)·구읍(舊邑)·용북(龍北)·하전(荷田)·송동(松洞)·문앙(文仰)·원사(院四)·곡창(谷昌)·송정(松亭)·염성(鹽城)·다보(多寶)·중평(中坪)·유성(楡城)·기암(奇巖) 등 20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이원읍이다.
지형은 북부와 서부가 높고 남동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고 있다. 북부에는 쓰리산(1,015m)·추덕산(1,000m)·작봉(870m)·성령(496m) 등 비교적 높은 산과 고개가 있다. 서부에는 영덕산(1,407m)·매봉(932m) 등 800m 안팎의 산들이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군의 중심부를 남대천(이원)이, 동부에는 동대천이 서남부에는 중평천이 흘러 이원만으로 유입하며, 문안저수지와 의덕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해안선은 길이 45㎞로서 단조로우나 남대천 하구를 중심으로 이원만이 이루어졌고, 전초도·소도·알섬·까치섬·갈바위섬들이 널려 있다. 기반암은 중생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토양은 대부분 모래가 많은 갈색산림토이며, 하천 연안에 충적토가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8.8℃, 1월 평균 기온 -4.4℃, 8월 평균 기온은 22℃이며, 내륙 지대에 비하여 습도가 높고 바람이 강하다. 연평균 강우량은 745㎜ 정도이다.
산림면적은 군 넓이의 73%로서 소나무를 주로 하는 침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잣나무·이깔나무·참나무·사시나무 등이 섞여 있으며, 그 밖에 산채와 약초들이 생장하고 있다. 이원만 연해의 밥조개, 송동과 문앙의 송이버섯, 곡구의 백리향 등은 이 군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농경지는 군 전체 면적의 18%이며, 그중 논이 36.6%, 밭 51.2%, 과수원이 10%를 차지하고 있다. 쌀은 문앙·대덕·의덕저수지 등 관개시설이 있는 남대천 유역에서 주로 생산되며, 옥수수·콩·감자 등 잡곡류와 대마·들깨·담배 등의 공예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 과일은 사과·배·복숭아·포도·추리 등이다. 축산업과 양잠도 발전하여 소·돼지·양·염소·닭을 사육하고 있으며, 뽕누에와 가둑누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군내에는 차호수산사업소를 비롯하여 10여 개의 수산협동조합이 설치되어 명태·도루메기·멸치·낙지·임연수어·가자미 등의 어로작업과 다시마·미역·조개류의 천해 양식 사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냉동 시설과 수산물 가공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연해에 널려 있는 밥조개는 이 지역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차호·나흥 지역에는 고품질의 적철광과 활석이 적지 않게 매장되어 있으며, 연간 20만여 톤이 채굴, 생산되고 있다.
공업은 나흥철도공장을 비롯하여 기계제작공장과 식료·직물·유리·철제·건재 및 일용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지방 공장들이 설치되어 있다.
교통망으로는 해안선을 따라 평라선(평양∼나진)이 지나가고 있으며, 북청·단천·덕성군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해상 운수는 차호항을 중심으로 단천과 신포를 연결하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운항되고 있다.
군내에는 이원구석(북한 천연기념물 제289호)·이원학사대(북한 천연기념물 제290호)를 비롯하여 많은 경승지가 있다. 구석은 원생대에 형성된 규암이 파쇄되어 달걀 모양의 크고 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곳이며, 학사대는 백두산 용암이 바다로 흘러 기암괴석과 만물상을 이루는 곳이다.
그 밖에 북두칠성 모양의 전추도, 중국의 적벽을 닮았다는 적벽강, 약 3,300㎡에 이르는 넓은 바위와 폭포가 있는 대온암, 선선들이 모여들었다는 군선, 기생이 춤추는 모습과 같다는 여기암, 난도, 형제암, 쌍적대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용흥리 마운령에는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마운령비가 있었다는 운시산성과 시문산성·남이산성·오국산성·성산산성 등이 있다.
사찰로는 정광사·운흥산·복흥사·해초암·옥수암 등이 있으며, 청산리 북쪽에는 복흥사7층탑이 현존하여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개의 고등기술학교와 이원고등중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