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청정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비(大妃)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제도.
이칭
이칭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수렴청정은 조선시대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비(大妃)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다.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의 줄임말로 발을 치고 함께 정치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의 어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攝政)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간의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여 신하들과 대비가 얼굴을 맞대고 업무를 보는 것을 예법에 어긋났다고 여겼기 때문에 발을 드리웠다. 13세에 즉위한 성종 때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처음 시행하였으며, 모두 7회 시행되었다. 대체로 왕이 20세가 되면 철렴환정(撤簾還政)이라고 해서 물러났다.

정의
조선시대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비(大妃)가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제도.
개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을 줄인 용어로, 발을 치고 함께 정치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 혹은 왕대비(王大妃)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자 운영방식이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 이전 왕의 어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攝政)에서 변화한 것이다. 성종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청정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에는 모두 7회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내용

수렴청정의 본래 명칭은 수렴동청정이다. 수렴은 ‘발을 드리운다’는 뜻이고, 청정은 ‘정사를 듣는다’는 것이다. 곧 수렴청정은 왕과 함께 발을 드리우고 정치를 하는 것을 뜻한다. 발을 치는 이유는 조선이 남녀 간의 내외(內外)를 엄격히 구분하였던 유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라 할지라도 남성들인 신하들과 얼굴을 맞대고 업무를 보는 것은 내외법(內外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렴청정은 즉위하는 왕이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나이 일 때 시행되었다.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던 세조비 정희왕후는 성종(成宗)이 13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여 20세가 되자 정치에서 물러났다.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는 것을 ‘철렴환정(撤簾還政)’이라고 하며 ‘철렴’이라 줄여서 지칭한다. 중종문정왕후(文定王后)명종(明宗)이 12세에 즉위하자 20세가 될 때까지 9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선조(宣祖)는 16세에 즉위하였으나 명종이 승하한 후 급작스럽게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이 될 수업을 받지 못했다. 이에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8개월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후 수렴청정은 시행되지 않다가 19세기에 연이어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다. 영조정순왕후(貞純王后)순조(純祖)가 11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순조가 15세가 되는 해부터 친정을 하도록 4년간 수렴청정을 마무리하였다. 순조 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두 차례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憲宗)이 8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순조의 선례를 따라 15세부터 친정을 하도록 7년간 수렴청정 후 철렴하였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철종(哲宗)을 왕위 계승권자로 결정하고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은 19세에 즉위하였으나 가족이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서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의 군호도 받지 못했고, 관례도 치르지 않았으며, 왕이 될 수업은 더욱 전무하였다. 이에 순원왕후는 철종이 21세가 되기까지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익종(翼宗)신정왕후(神貞王后)흥선군(興宣君)의 아들 고종(高宗)을 후사로 정하고 즉위하도록 하였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12세였기에 신정왕후가 15세가 될 때까지 4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렇듯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나이가 어리면서 왕이 될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때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선조대 인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대왕대비가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에 시행되었던 섭정이 왕의 모후(母后)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과 차이를 지닌다. 왕의 모후는 어머니로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주로 대왕대비가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즉위한 어린 왕과의 사적인 관계, 곧 할머니와 손자와의 관계를 앞세운 것이 아니다. 대왕대비는 선선대왕의 왕비로서 치국(治國)에 내조한 공이 있고, 국모(國母)로써 왕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왔다는 공이 있기에 어린 왕이 즉위한 상황에서 왕이 성장하여 친정할 때까지 국정을 분담하고, 왕을 성장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는 논리를 담고 있다. 곧 즉위한 어린 왕과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는 사적인 관계가 아닌 공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함께 정국을 운영한 것이었다.

수렴청정을 하였던 대비의 정치 참여는 조선 전기부터 관련 조항이 정비되어 순조대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으로 반포되었다. 「수렴청정절목」은 대비의 정치참여 방식과 역할, 위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왕대비는 왕이 정무를 보는 편전(便殿)에서 발을 치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수렴을 설치하고 수렴청정을 하는 것은 5일에 한번 이루어졌다. 곧 한 달에 6번 정도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을 할 때 왕은 앉아만 있고 대비가 국정을 모두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왕에게 먼저 보고하고, 사안에 따라 대비가 의견을 더하고, 때로는 대비에게 직접 보고하는 사안에 대해 하교하는 방식이었다. 그 외에는 신하들을 만나거나, 왕이나 신하들이 보고한 사안에 대해 하교를 내리는 방식으로 정무를 처리하였다. 수렴청정을 할 때, 왕과 대비의 위차(位次)는 대비가 높은 자리에 앉아 존숭되었다. 왕의 위치는 조선 전기에는 대비가 중앙에, 왕은 그 서쪽에 위치하다가 19세기에는 왕이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나이가 어리지만 국정운영의 주체는 국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의 지위는 왕과 같았다. 왕실의 어른으로 존숭받기는 하였으나, 수렴동청정이었던 만큼 왕과 함께 같은 지위로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조처였다. 그리고 대비는 왕이 스스로 친정(親政)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국정에서 물러나는 철렴환정을 하였고, 이후에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문정왕후를 제외하면 대개는 이러한 원칙을 준수하였다.

변천과 현황

(1) 조선시대 이전 섭정의 시행

수렴청정은 조선시대 이전에 시행되었던 섭정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대 · 고려시대에도 어린 왕이 즉위한 사례가 있었고, 이때에는 왕의 어머니 모후가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이 시행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태조왕(太祖王)이 7세에 즉위하자, 어머니였던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신라에서는 진흥왕(眞興王)이 7세에 즉위하자, 모후였던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只召太后)가 섭정을 하였다. 고구려 태조왕과 신라 진흥왕은 모후의 섭정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왕의 역량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왕이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펴며 고구려가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고,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한 번의 섭정은 신라 하대 혜공왕(惠恭王)이 8세에 즉위하자, 어머니였던 만월부인(滿月夫人)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때의 섭정은 혜공왕대 신라가 혼란한 상황에 빠졌던 것으로 보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삼국시대의 섭정은 모두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모두 그 어머니였던 모후들이 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고려에서도 역시 어린 왕이 즉위한 경우 왕의 모후가 섭정을 하였다.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애왕태후 황보씨(獻哀王太后 皇甫氏), 곧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아들 목종(穆宗)이 18세에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천추태후는 18세였던 목종의 나이를 고려하면 섭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서경 세력이 천추태후를 중심으로 결집하려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선종(宣宗)의 왕비였던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도 아들 헌종(獻宗)이 10세에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이때 섭정은 3년간 시행되었고, 국정의 혼란을 가져오지 않았던 만큼 그 공을 인정받았다.

한편 원간섭기에는 충목왕충정왕대에 충혜왕의 왕비이며 원나라 공주였던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을 하였다. 덕녕공주는 아들 충목왕(忠穆王)이 8세에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이때 섭정은 관료들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덕녕공주는 충목왕 사후 12세의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다시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덕녕공주는 충정왕의 모후가 아니면서 정치에 관여했기 때문에 관료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왕의 어머니로서 어린 아들을 대신한 섭정은 반발이 없었으나 모후가 아닌 경우에는 관료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는 곧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왕의 모후가 섭정을 하며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어머니로서 아들을 보호한다는 논리 속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2) 조선시대 수렴청정의 제도적 정비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성종이 13세로 즉위하였을 때 정희왕후가 최초로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예종대 수렴청정을 최초로 하였다고 알려진 바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예종은 세조대 이미 세자로서 서무 결제를 하고 있었고,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던 어떠한 기록도 당대에는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후 수렴청정의 선례를 성종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인식하는 만큼 예종대 수렴청정은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수렴청정이 제도적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최초의 수렴청정이 성종대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수렴청정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곧 정희왕후는 발을 설치하고 신하들을 면대한, 곧 수렴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렴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은 아직 성리학이 이데올로기로서 완전히 정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내외 관념이 후대보다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종은 직접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해 대왕대비에게 여쭈어보겠다고 하여 정희왕후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희왕후는 보고받은 사안에 대해 하교를 내리는 방식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였다. 곧 간접적인 정치 참여를 했던 것이므로, 수렴동청정이 아닌 청정이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최초의 수렴청정으로 인식하는 것은 수렴청정이 정치제도이면서도 정치 운영방식이기 때문이다. 성종대에는 정치제도로서 수렴청정은 아직 그 격식이 갖추어지지 못했지만 정치 운영방식으로의 대왕대비의 국정운영이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던 만큼 수렴청정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수렴청정의 제도적인 중요한 요소들이 만들어진 것은 명종대였다. 이때에는 처음으로 수렴을 설치하였다. 명종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수렴의 설치가 논의되었고, 처음에는 문정왕후의 처소였던 충순당에 수렴을 설치했다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에 수렴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대왕대비의 정치 참여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왕과 대비의 위차는 발의 안쪽에 문정왕후가 위치하고, 명종은 발 바깥쪽 서쪽에 앉았다. 문정왕후와 명종의 관계에서는 문정왕후를 존숭한 위차이다. 이유는 동쪽이 윗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대왕대비의 위상이 높았던 것을 반영한다. 그러면서도 관료들은 북쪽을 향해 앉고, 문정왕후와 명종은 이들을 남면(南面)하여 바라보고 정무를 처리했다. 이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한 달에 6번 수렴청정을 하는 것, 왕과 대비가 경연에 함께 참여하고 이때의 위차도 명종대 마련된 것이다.

명종대 갖추어진 제도적인 측면의 수렴청정의 규정들은 19세기에 「수렴청정절목」을 제정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순조대 제정된 「수렴청정절목」은 수렴청정을 결정한 후 예조(禮曹)에서 준비하였으며, 그간의 절차와 격식 등을 참고로 하여 제정되었다. 그리고 절목을 반포한 후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수렴청정이 정치제도로 완비된 것을 의미한다. 순조대의 절목은 이후 19세기 내내 그 내용이 바뀌지 않고 연이은 수렴청정의 지침이 되었다.

「수렴청정절목」은 크게 대비의 임어 규정, 위차와 위상, 국정참여와 출납의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대왕대비의 임어(臨御), 곧 신하들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임무를 수행하는 규정이다.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는 왕이 정무를 보는 편전에서 발을 치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편전에서 수렴청정은 절목에 5일마다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대략 한 달에 여섯 번 정도 수렴동청정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사안은 수시로 청대를 허락하였다.

한편 대왕대비는 왕이 공부하는 경연(經筵)에도 발을 치고 참석하도록 하였다. 경연은 왕의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 필요했으나, 경연 후 신하들과 국정의 중요한 사안들을 논의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에게는 업무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시작할 때 ‘수렴청정의식’을 거행하였다. 관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 의식은 수렴청정을 공식화 · 합법화 하는 행사였다.

둘째, 수렴청정이 시행될 때 왕과 대왕대비의 위차와 위상을 절목에서 규정하고 있다. 왕은 중앙에서 남쪽의 신하들을 보고 앉으며, 대왕대비는 왕과 사이에 발을 치고 왕의 동쪽에 자리하였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할 때 앉는 위치와 바뀐 것이다. 이것은 동쪽이 윗사람이 앉는 자리로 대왕대비를 존숭한 것이지만, 신하들과의 관계에서는 왕이 정위(正位), 곧 중앙에서 남면함으로써 나이는 어리지만 국정 운영의 주인은 국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탕평정치기를 거치며 높아진 왕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다.

왕이 중앙에 임어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대왕대비는 윗사람으로 존숭 받았으며 왕과 같은 위상을 부여받았다. 왕과 대왕대비의 하교의 명칭은 왕이 전왈(傳曰) · 전교 왈(傳敎曰), 대왕대비가 대왕대비 전왈(大王大妃傳曰) · 대왕대비 전교왈(大王大妃傳敎曰)이라고 하였다. 스스로를 지칭하는 용어도 ‘여(予)’라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에서 선례로 삼았던 송나라에서는 황제는 ‘여(予)’ 또는 ‘오(吾)’라고 하였지만 황태후는 ‘여(予)’라고 칭하지 못하였고 ‘오(吾)’라고만 칭할 수 있었다.

한편 왕과 대왕대비가 받는 공상(供上)은 그 규모가 같았다. 대왕대비가 왕실의 가장 어른이라고 해도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을 때는 왕보다 적게 받았다. 그러므로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의 위상은 왕과 같았던 것이다.

셋째, 국정 참여와 출납의 방법을 규정하였다.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할 때 많은 국가의 일을 처리하였다. 직접적으로는 편전에서 5일에 한번 씩 수렴동청정을 하여 신하들이 직접 보고한 사안을 듣고 결정하였다. 그 외에 간접적인 국정 참여도 이루어졌다. 이는 왕이 처리하지 못한 사안을 보고받고 이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왕은 상소장계는 직접 보고를 받지만, 이를 결정할 때 때로는 대왕대비에게 알리고 논의하였다. 그러나 역모, 군사, 국정의 중요한 일은 대왕대비가 직접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실제 국정 운영의 중요한 몫은 대왕대비가 담당한 것이 된다. 이러한 수렴청정의 운영에서 중요한 원칙은 일단 보고는 왕에게 먼저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정 운영의 주체는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상소는 왕에게 직접 올려 처리하도록 하였다. 왕은 이를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정치적인 역량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3) 조선시대 수렴청정의 시행

조선에서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대 시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지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차남 자을산군(者乙山君)을 후사로 지명하여 즉위하도록 하였다. 바로 성종의 즉위였다. 성종의 즉위는 적장자 승계, 곧 종법의 질서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의 나이는 4세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너무 어렸지만,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는데도 13세의 성종이 즉위한 것은 성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와 그와 협력했던 신숙주원상들이 정희왕후와 논의한 것이었다.

성종은 그러한 사정으로 왕위 계승이 결정된 바로 그날에 즉위를 하였다. 그리고 성종의 나이가 13세였던 점을 들어 신숙주 등 원상들은 정희왕후에게 정사를 청단(聽斷)할 것을 부탁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의 어머니 수빈 한씨(粹嬪韓氏)에게 청정을 청하였으나 세자빈이었던 소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다. 왕의 모후이기는 하나 세자빈이었기 때문에 왕비로서 종사를 계승하고 번성하도록 한 공이 없었던 것이다. 곧 선왕과 함께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했다. 이것이 조선 이전의 섭정과 다른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희왕후가 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조선의 선례가 되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는 해에 철렴을 하며 8년간 수렴청정을 마감하였다.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중종의 차남이었던 경원대군(慶原大君)이 12세로 즉위하였다. 문정왕후는 명종의 어머니이며 대왕대비로 명종이 20세가 될 때까지 횟수로 9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문정왕후는 다른 대비들이 신하들의 청을 사양하다 마지못해 수렴청정을 허락했던 것과는 달리 스스로 전교를 내려 수렴청정을 직접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문정왕후는 당시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고, 그러면서도 명종의 모후였다. 조선에서는 유일한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권한과 명분을 강화할 수 있는 요인이 만들어진 것도 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후대에 좋지 않은 예로 비판받았다. 그 이유는 문정왕후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 윤원형에게 밀지(密旨)를 전달하여 사건을 주도하도록 하였고, 집권한 소윤은 매관매직, 토지 탈점, 사무역을 통한 부를 축적하는 등 경제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숭불정책(崇佛政策)을 시행하여 선교(禪敎) 양종을 복설하고 많은 불사를 통한 재정을 과용하는 등 조선의 질서를 흔들었다. 명종대에는 수렴청정의 공적 측면이 퇴색되고 사적인 관계를 통한 국정의 운영, 조선왕조 체제의 혼란 등이 야기되었는데, 이는 문정왕후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철렴 이후에도 정치에 관여하여 그로 인한 폐단이 심화되었다. 그래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당대와 후대에 매우 비판받았고,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명종이 재위 22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중종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이 즉위하였다. 그가 곧 선조이다. 하성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昌嬪安氏)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다. 선조는 16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인순왕후는 인종인성왕후(仁聖王后)가 있었지만, 지위가 같은 왕대비였다는 점과 명종의 승하 때부터 보여준 인순왕후의 적극적인 면모, 영의정 이준경의 적극적인 청으로 조선시대에는 유일하게 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기에 왕과 대비의 역할은 선조가 인사권을 담당하고, 다른 공사의 처분은 인순왕후가 시행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즉위 시에 나이가 앞서 성종 · 명종보다 많았던 것, 그리고 그사이 성숙된 사림 정치의 구도 속에 인순왕후는 8개월 만에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

19세기에는 연이어 어린 왕, 혹은 왕위를 계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국왕이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1800년(정조 24)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였던 영조 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1804년(순조 4)부터 순조가 친정을 할 수 있도록 약 4년간 수렴청정을 한 후 물러났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수렴청정절목」의 제정으로 제도로서 완비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순조대 정국은 정조 연간 이루어 놓은 체제가 무너지고, 급격한 정치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진 대 혼란기로 알려져 왔다. 이때 정순왕후는 선왕의 유지를 잘 지키면서도 원하는 대로 정국의 변화를 가져왔다. 영조 · 정조대 정치의 중요한 기반인 의리 문제를 정순왕후는 영조의 의리로 해석하여 정국의 변화, 정치세력의 교체를 단행할 수 있었다.

순원왕후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렴청정을 두 번 하였던 인물이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1834년(순조 34) 순조가 재위 34년 만에 승하하고 8세의 세손, 곧 헌종이 즉위하자 7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순원왕후는 헌종대에 또 다른 외척인 풍양 조씨와 협력을 이루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는 순조가 헌종의 보도를 풍양 조씨 조인영(趙寅永)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순원왕후는 선왕의 유지에 따라 선대부터 이어 온 안동 김씨 · 풍양 조씨 두 가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순원왕후의 행보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은 안동 김씨의 정치력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헌종의 왕비로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간택되자, 안동 김씨는 외척의 지위를 다음 대로 이어갈 수 있었다.

헌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가운데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이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게 되었다. 철종은 사도세자와 양제 임씨(良娣林氏)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손자였다. 당시 왕위 계승의 곤란함으로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귀양 가 있던 철종을 즉위하도록 하였다. 이때 철종은 19세였음에도 관례도 치르지 않았고, 왕이 될 수업이 전무했던 만큼 순원왕후는 다시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는 조선조에서는 최초의 경우에 해당한다.

철종대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은 하되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철종이 하교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는 철종의 국정 운영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면서도, 철종의 나이를 고려한 조처였다. 수렴청정은 본래의 목적에 맞게 시행되긴 했으나, 2대에 걸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결국 안동 김씨가 외척세도를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고, 이로 인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풍양 조씨 출신의 신정왕후는 남편인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 중 승하하게 되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가 아들 헌종(憲宗)의 즉위 후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숭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아들이 즉위했음에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있었기에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던 신정왕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2세의 고종을 즉위하도록 하고 수렴청정을 하였다.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가 철종대 안동 김씨와의 대립과정에서 축출되어 정국 운영에 협력할 가세(家勢)가 유지되지 못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협력하고 종친들의 위상을 강화시켜 주며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러면서도 익종이 추진하려 하였던 경복궁을 중건하고 조선왕조 개국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여 이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다. 또한 당시 큰 사회문제였던 과거의 폐단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 하였는데, 이 역시 익종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발달된 관료제 하에서 정치제도로 자리매김하였다. 어린 왕이 왕이 될 준비와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수렴청정은 조선왕조 체제 유지를 위한 최선은 아닌 차선책은 될 수 있었다. 조선의 수렴청정은 공통적으로 철렴이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철렴은 국왕이 성년이 되거나,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할 때 이루어졌다. 철렴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중국에서도 송나라 선인태후부터 철렴이 이루어졌다. 철렴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수렴청정이 대왕대비가 권력을 장악하려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린 국왕이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국정을 보좌하여 왕조를 유지하고 왕의 정치적 능력을 함양했다는 장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수렴청정은 갖추어진 정치제도로서 조선왕조체제를 유지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수렴청정의 부정적인 면은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권위를 바탕으로 외척들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정희왕후는 비교적 외척으로 인한 폐단이 적었으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형을 대표로 하는 소윤(少尹)이 집권을 하며 각종 폐단을 가져왔다. 정순왕후는 표면적으로는 왕과 분담하여 국정 운영을 잘하였지만, 앞서 정조대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경주 김문 외척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순원왕후는 헌종과 철종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소위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를 야기하였고, 신정왕후는 이러한 정국을 전환하고자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이와 같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외척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이로 인한 폐단이 발생했던 것은 대왕대비는 여성이었고, 조선시대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이 즉위한 비상상황에서 정치를 하게 되긴 하였으나, 그 이전에 정치 경험이 없었던 대왕대비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인척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이 명암을 모두 가지고 있긴 하나, 그 의미를 부정 일색으로 퇴색시키는 것보다는 제도와 운영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윤발(綸綍)』
「한국사에서 섭정·수렴청정권의 변화 양상」(임혜련, 『한국사상과문화』62집, 2012)
「19세기 수렴청정의 특징: 제도적 측면을 중심으로」(임혜련, 『조선시대사학보』48, 2009)
「19세기 수렴청정 연구」(임혜련,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선시대 수렴청정의 정비과정」(임혜련, 『조선시대사학보』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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