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공주(慶愼公主)는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청주이씨 이애(李薆, 1363∼1414)와 혼인을 하였으며, 슬하에 아들 이후(李厚)를 두었다. 1426년(세종 8)에 사망하였다.
고려 우왕대 이성계가 요동 공격을 위해 출전하자, 최영은 그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으려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자, 이방원은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에 있던 신의왕후와 포천 철현(鐵峴)에 있던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동북면으로 피난시켰다. 경신공주는 이때 동생 경선공주(慶善公主)와 함께 재벽동에 있다가 오빠 이방원의 보살핌으로 어머니 신의왕후와 함께 동북면으로 피난을 갔다. 이방원이 이때 두 어머니와 경신·경선 공주뿐만 아니라 이방번·이방석 등 어린 동생들을 피난시켰다는 것으로 보아 경신공주는 태조의 5남 이방원의 동생으로 여겨진다.
남편 이애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이거이(李居易)의 아들이다. 원래 이름은 이백경(李伯卿)이었다가 이저(李佇)로 개명한 후 다시 이애로 바꾸었다. 이애는 1398년(태조 7) 이거이와 함께 이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상당후(上黨侯)로 봉작되었다. 그리고 1401년(태종 1) 2차 왕자의 난, 곧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이애의 집안은 공신 가문이면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애의 동생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가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1426년(세종 8) 경신공주가 사망하자, 세종은 내관을 보내 조문하도록 하고 제문을 지어 내렸다. 또한 쌀과 콩 각 50석과 종이 2백권을 부조하고, 상등(上等)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