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1776년 즉위한 후 선왕들의 어필과 어제를 봉안하기 위해 창덕궁 내에 규장각(奎章閣)을 창설하도록 하고 그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이다.
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의 중심에 있는 전각으로, 정조대 정치와 문화의 중흥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조는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을 경험하였고, 영조 말 세손시절 그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공세 속에 즉위하였다. 정조는 개혁정치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으며, 학문과 문화의 중흥을 이루었다.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 규장각을 창덕궁에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선왕의 책과 어필 그리고 어제 등을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규장각은 처음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하였다. 정조는 이후 규장각을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변화시켜 많은 도서를 수집하여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삼았다. 또한 개혁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물들을 육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하여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이곳에서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김조순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가 배출되었다.
규장각도는 김홍도의 작품이다. 10~14세 무렵, 문인 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김홍도는 영조대에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영조의 팔순상 어진도사로 임명되어 그 공로로 장원서 종6품 별제 동반직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영조 말년에 실력 있는 어진도사로 활동하였던 그였기에 규장각이 창설된 후 이를 그림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暎花堂) 옆에 2층 누각으로 건축되었다. 1층이 규장각이고, 2층 누각이 주합루(宙合樓)였다. 「규장각도(奎章閣圖)」는 규장각이 그림의 주제였던 만큼, 화면의 중앙에 규장각을 실제보다 크게 강조하여 그렸다. 이어 사방에 부속 건물과 주변 경치를 에워싸듯이 묘사하였다. 종이에 채색하여 그린 「규장각도」는 김홍도가 32세에 그린 그림으로, 초기 본격적인 산수화풍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가로 115.5㎝, 세로 143.2㎝의 크기로, 종이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대 학술과 정치의 중추기관이었던 규장각을 단독으로 그린 그림으로 규장각의 위상을 가늠하는데 참고가 된다. 회화적으로는 김홍도의 다양한 화풍 중에서 산수화풍의 그림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그 다양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정조대 기록문화의 발전상을 파악할 수 있는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