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종(朴周鍾, 1813년∼1887)의 자는 문원(聞遠)이고, 호는 산천(山泉)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조선 후기 학문에서 백과전서학이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가는 추세 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14편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를 편찬하였다. 1862년(철종 13) 삼정구폐책을 올려 우등 5인에 들었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박필녕(朴弼寧)이고, 어머니는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인 풍산 류씨 류정조(柳貞祚)의 따님이다. 함양 박씨는 박종린(朴從鱗)이 김안로(金安老)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상주에서 예천 금당실로 이주하였다.
박주종의 학문은 퇴계의 학문을 근간으로 하여 박손경(朴孫慶)·박기녕(朴箕寧)으로 이어지는 가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으나, 고향에서 강학 활동에 힘썼다.
박주종은 영남 남인들의 입장을 반영한 활동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을 문묘(文廟) 종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855년(철종 6)에는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萬人疏)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도세자를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록한 「청경모궁전례소(請景慕宮典禮疏)」를 만들었으며, 전례소를 올리게 된 배경을 「경모궁전례사의(景慕宮典禮私議)」로 작성하였다. 박주종은 류성룡계의 병산서원(屛山書院)과 김성일(金誠一)계의 여강서원(廬江書院)의 분기에 따른 당시 유림의 분열에 대해 이들의 관계를 완화하기 위한 입장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 발생하자, 온건한 입장에서 삼정에 대한 제도적 개선론을 담은 삼정구폐책(三政救弊策)을 내놓았다. 곧 어지러워진 현실은 삼정의 문란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려면 옛 제도의 정신을 회복하고,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며 조정에서 먼저 절약할 것을 주장하였다. 철종은 대책의 내용에 따라 우등자를 관직에 등용하겠다고 하였고, 박주종은 우등 5인에 들었으나 관직에 임용되지는 못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영남지역에서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박주종은 1877년(고종 14) 소두(疏頭)가 되어 서원 복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상소를 통한 영남 유림의 뜻을 조정에 전하였는데, 김성일과 류성룡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승무소(陞廡疏)」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884년(고종 21) 의대절목(衣帶節目)이 반포되자 「청물개의제소(請勿改衣制疏)」를 올려 전통 의제를 고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저술로는 1850년(철종 1) 우리나라 향약 관련 역사에 대한 분류사인 『향약집설(鄕約集設)』과 문물 백과사전인 『동국통지(東國通志)』를 편찬하였다. 『동국통지』는 기전체(紀傳體)의 ‘지(志)’의 형식을 빌렸지만, 과거의 전통을 일관된 시각과 자양한 주제별로 정리하였다. 또한 여러 성현과 송·명의 선유(先儒)들의 격언이나 지론을 자료로 삼은 격언집 『면학유감(勉學類鑑)』,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배척하는 『수양만설(修壤謾設)』을 편찬하였다. 이외에 그는 교감(矯監) 작업을 하였는데, 박손경의 『주서강록간보차의(朱書講錄刊補箚疑)』를 교감하였고,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등을 교감하였다.
1887년(고종 24) 청(淸)·신(愼)·겸(謙)·졸(拙) 4자를 후손들에게 유훈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