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손경(朴孫慶, 1713∼1782)의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자는 희유(希有)이며, 호는 남야(南野)이다.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생의 유림(儒林)이다. 퇴계학파의 학통을 가지고 있으며, ‘영남삼로’로 추앙받았던 학자였다.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을 지낸 만헌(晩軒) 박성옥(朴成玉)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 권두인(權斗寅)의 손녀이며 권규(權葵)의 따님이다. 박손경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당곡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함양 박씨 세거지로 ‘금당맛찔 반서울’이라 불렸던 곳이다. 산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학자를 많이 배출한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박손경은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유학을 주창한 박충좌(朴忠佐)의 후예로 고조 박정시(朴廷蓍)는 형조정랑을 지냈으며, 청백리의 칭송을 받았고, 아버지 박성옥은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있자 예천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박손경은 가정에서는 효와 동기간 우애를 실천하였다. 계모를 정성껏 봉양하였고, 아우 박민경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박민경이 한양에 거주하는 인척에게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 집안이 역모로 온 가족이 노비가 되자, 박손경은 동생을 위해 백방으로 힘을 쏟아 영조가 이를 알고 동생을 본가로 보내주기도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지만 곧 포기하고,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다.
박손경의 학통과 연원은 퇴계학파로 이황의 학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였다. 그러면서도 가학을 계승하였다. 그의 뛰어난 학문과 인성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1779년(정조 3) 영남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이 그를 추천하였고, 1782년(정조 6)에는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영남 도내 가장 명망 있는 선비로 추천하였다. 이때 영릉참봉과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박손경은 가학을 계승하여 고학(古學)에 몰두하다 중년 이후 성리학에 정진하여 30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박손경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은 이대산(李大山)·최백불암(崔百弗庵)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칭하였으며,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금당실에 여러 차례 예방하여 헌시하는 등 박손경은 국내 학인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저서로 10권 5책의 『남야집(南野集)』이 있다.
1782년(정조 6)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유림들은 회산사(晦山祠)를 세워 그를 향사하였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83년 박충좌(朴忠佐)를 모신 금곡 서원(金谷書院)이 복원되자, 이곳에 박눌(朴訥)과 함께 추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