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장(白天藏, 생몰년 미상)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수원 백씨 중시조로 알려져 있다. 시호는 문익(文益)이며, 수성백(隨城伯)의 봉작을 받았다.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한 후,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承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등을 역임했다. 원나라의 순제에게 나이가 많아 고국에 돌아갈 것을 청하여 귀국한 후 수성백(隨城伯)에 봉해졌고 그 후 수원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충선왕이 애도하는 마음에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문익(文益)이라 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한림원 정4품 학사로 왕명을 받들어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과거를 관장하며 서적을 편찬하였고,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왕에게 강의하고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왕의 거둥에 시종하는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중서문하성의 정당문학으로 국정을 논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 원나라로 가서 그 문재(文才)를 날렸던 것으로 보이며, 원나라의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으며, 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길 때 10리 이내 묘소는 이장하게 했으나, 백천장의 묘는 조정에서 보호하여 옮기지 않았다 한다.
묘역의 봉분 앞은 장대석을 쌓아 치장하였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묘비는 봉분의 오른쪽에 신비와 구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석물로는 양석,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 등이 있다. 묘역 앞 약 50m 지점에 큰 연못이 있고, 묘소 입구 약 200m 지점에는 1975년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