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

가례도감의궤 중 표지
가례도감의궤 중 표지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왕비. 계비.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745년(영조 21)
사망 연도
1805년(순조 5)
본관
경주(慶州)
출생지
경기도 여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정순왕후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왕비로서 계비이다. 1745년(영조 21)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사망했다. 영조비 정성왕후 사후 15세의 나이로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노론 벽파계 집안 출신으로, 국혼 후 오빠 김귀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 중에 노론 벽파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후 정조의 측근들을 내치고 신유사옥으로 남인 청류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정조 재위기의 개혁 정치를 원점으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의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왕비. 계비.
생애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1745년(영조 21) 11월 여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이고, 어머니는 원주 원씨(原州 元氏) 원명직(元命稷)의 딸 원풍부부인(元豊府夫人)이다. 김한구의 가문은 효종대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金弘郁)의 후손으로 충청도 서산에 세거하였다. 정순왕후의 백부 김한록(金漢祿)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호론(湖論)의 적전(嫡傳)이다.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사망 뒤 1759년(영조 35)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간택 이유는 경주 김문이 학문적으로도 명망 있고, 영조의 첫째 사위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을 배출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림 가문답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있었던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국혼 후 김귀주(金龜柱)를 필두로 정계 진출이 활발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辟派)였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남당(南黨)을 이루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北黨)과 대립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정조는 척신 정치의 청산을 기치로 하여 영조 후반기 활발히 활동하였던 척신들을 배척하였고, 이때 김귀주 등 친족들이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1803년(순조 3)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치에서 물러났다. 1805년(순조 5)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에서 61세로 승하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활동사항

정순왕후는 1767년(영조 43) 경복궁 옛터에서 친잠례(親蠶禮)를 주관하였는데, 이는 선조대 이후 300여년 만에 재개된 의식이었다. 정조 즉위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정조와 대립하였다. 오빠 김귀주가 정계에서 배제된 후 유배 중 사망한 반면, 정조가 강화도에 귀양 가 있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을 사적(私的)으로 만나고 편의를 봐주자 신하들의 공론을 이끌어내며 정조와 맞섰다.

1800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선례를 따라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수렴청정의 시행 세칙으로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이 제정되어 이후 19세기에 연이어 시행된 수렴청정의 지침이 되었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절목」에 의거하여 합법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정국 운영에 있어서는 표면적으로 선왕의 유지 계승을 표방하였으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沈煥之)를 영의정에 임명하여 벽파로 환국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반면 정조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고, 서유린(徐有隣), 안동 김씨 세신(世臣)이었던 김이재 · 김이교 · 김이익 등을 처벌하였으며, 윤행임(尹行恁)도 권세를 농단하였다 하여 사사(賜死)하였다. 여기에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통해 정조의 동생 은언군,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을 사학죄인으로 사사(賜死)하였다. 또한 정조대 진출이 활발했던 남인 청류들을 신유사옥과 연관 지어 처벌하였다. 신유사옥은 남인들의 다수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정조대에 입지가 강화된 남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제도적으로 완비된 「수렴청정절목」을 준수하여 정국을 운영함으로써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의 공백을 메우고, 이후 친정(親政)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선왕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정조연간의 정치를 되돌리는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고, 또 신유사옥을 통해 남인과 종친 · 외척을 탄압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이다. 능은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쌍릉을 이루었으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에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열성왕비세보(烈聖王妃世譜)』
『돈녕보첩(敦寧譜牒)』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정순왕후윤발(貞純王后綸綍)』(奎 12862)
『한중록(閑中錄)』(혜경궁 홍씨)
『춘관통고(春官通考)』
『정조대 탕평정국의 군신의리 연구』(최성환,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9세기 수렴청정 연구』(임혜련,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선 영조대 친잠례 시행과 의의 -1767년(영조43) ‘정해친잠’을 중심으로」(임혜련, 『장서각』 25,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순조 초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정국변화」(임혜련, 『조선시대사학보』 15, 조선시대사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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