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고려의 제5대 왕.
이칭
본명
왕주(王伷)
장민(長民)
시호
헌화(獻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955년(광종 6)
사망 연도
981년(경종 6)
본관
개성(開城)
출생지
개경(開京)
관련 사건
광종의 호족세력 숙청, 왕승의 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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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경종은 고려 전기 제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75~981년이며, 태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즉위 초에 집정 왕선이 전횡을 일삼자 귀양을 보냈고, 980년(경종 5) 왕승의 모반을 제압하였다. 976년(경종 1) 전시과를 제정하고, 과거제도를 다시 시행했으며, 송과의 국교도 돈독히 하였다. 981년(경종 6) 병이 위독해지자 사촌동생인 개령군 왕치(이후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겼다. 여러 가지 치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사에 뜻이 없고 오락과 여색을 탐하고 바둑을 좋아해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의
고려 전기, 고려의 제5대 왕.
가계 및 인적사항

경종(德宗)은 재위 기간이 975∼981년으로, 이름은 왕주(王伷), 자(字)는 장민(長民)이다. 광종(光宗)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아들로는 헌애왕후(獻哀王后)가 낳은 목종(穆宗)이 있다.

주요 활동

부왕(父王)인 광종에 의해 추진된 호족(豪族) 세력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 965년(광종 16) 2월에 왕태자(王太子)로 책봉되었고 내사제군사(內史諸軍事)·내의령(內議令)의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부왕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불안하게 소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종은 독자적으로 정권을 담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즉위 초에 왕선(王詵)을 집정(執政)으로 삼아 정권을 맡겼다. 그리고 죄수들을 사면하고 광종 때에 참소(讒訴)당한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서로 함부로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여 원성이 높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976년(경종 1)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왕선은 복수를 빙자해 태조(太祖)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죽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왕선을 귀양보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복수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순질(筍質)·신질(申質)을 각각 좌집정(左執政)·우집정(右執政)으로 삼고, 모두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이는 정치 권력의 독주를 막고, 권력을 분산하여 서로 견제하고자 함이었다.

976년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그 해에 문무양반의 묘제(墓制)를 정하기도 하였다. 977년(경종 2)에는 과거 시험을 재개하였다. 이때 경종은 지공거(知貢擧)를 독권관(讀卷官)이란 명칭으로 바꾸고 진사시(進士試)를 주관하여 고응(高凝) 등 여섯 사람의 급제자를 뽑았다. 금석문(金石文)에 의하면, 이 무렵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이 독자적인 연호였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송나라와의 외교도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있었다. 979년(경종 4) 발해인(渤海人) 수만 명이 귀화(歸化)하였으며, 청새진(淸塞鎭: 현 평안북도 희천)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980년(경종 5) 왕승(王承) 등의 모역(謀逆)이 있었으나, 최지몽(崔知夢)의 건의에 따라 미리 대비해 왕승 등을 잡아 죽이고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981년(경종 6) 7월 병이 위독해지자 사촌동생인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 곧 성종(成宗)에게 왕위를 넘겼다.

경종의 업적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전시과는 제도적으로 미비한 점이 있었으나, 고려 전기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시초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이 때의 전시과는 관품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에 따라 제정한 것으로 외형상 940년(태조 23)에 제정된 역분전(役分田)과 비슷하다. 역분전 역시 지급 기준을 관계(官階)에 두지 않고 성행(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과는 지급 대상자를 광종 때 제정된 사색공복제(四色公服制)에 의해 네 계층으로 구분하고 있어, 관품과 인품을 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역분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광종 때 추진된 왕권강화책과 국가 체제 정비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즉, 경종은 광종이 닦아 놓은 치적(治積)을 바탕으로 역분전보다는 발전된 토지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던 듯하다.

경종의 정치적 태도는 이미 즉위 초에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부(金傅)에게 상보(尙父)·도성령(都省令)·식읍 1만호(食邑一萬戶)의 봉작(封爵)을 더한 것으로 보아, 신라계 정치 세력을 두둔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모후(母后)인 대목왕후 황보씨로 대표되던 지방 호족 계통의 정치 세력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즉위 초 조정에서 반광종(反光宗)의 분위기를 생성한 연유로 보인다.

이처럼 치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사(政事)에 뜻이 없고 오락과 성색(聲色)에 몰두하였으며, 바둑을 좋아해 정치와 교화가 쇠잔(衰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헌화(獻和)이며 능은 영릉(榮陵)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80)
이기백 편, 『고려광종연구』 (일조각, 1981)

논문

노용필, 「고려 경종초 개혁정치와 그 추진세력」 (『진단학보』 91, 진단학회, 2001)
전기웅, 「고려 경종대의 정치구조와 시정전시과의 성립기반」 (『진단학보』 59, 진단학회, 1985)
황선영, 「고려 시정전시과의 재검토」 (『부산사학』 10, 부산사학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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