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후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
이칭
성명
왕비(王㶨)
시호
장헌(莊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개성(開城)
출생지
개경(開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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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금관후는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이다. 어머니는 인예태후였다. 그는 유교적인 학식이 있어 부여공 왕수가 적경궁주에게 장가가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왕수의 어머니와 적경궁주의 어머니는 모두 이자연의 딸로 자매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의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
가계 및 인적사항

이름은 왕비(王㶨)이며, 문종(文宗)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자연(李子淵)의 장녀인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李氏)이다.

동복 형으로는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상안공(常安公) 왕수(王琇)·보응승통(普應僧統) 왕규(王規) 등이 있고, 동복 아우로는 변한후(卞韓侯) 왕음(王愔)·낙랑후(樂浪侯) 왕침(王忱)·총혜수좌(聰慧首座) 왕경(王璟) 등이 있다.

주요 활동

1077년(문종 31)에 특진(特進) 검교사공(檢校司空) 상주국(上柱國)에 올라 금관후(金官侯)라는 작호와 함께 식읍(食邑) 1천 호를 받았고, 1086년(선종 3)에 검교상서령(檢校尙書令) 수사도(守司徒) 식읍 2천 호로 승진하였다.

그는 유교적인 학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종비 인경현비(仁敬賢妃)의 소생인 부여공(扶餘公) 왕수(王燧)가 문종비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소생인 적경궁주(積慶宮主)에게 장가드니, 금관후는 변한후(卞韓侯) 왕음과 문종비 인경현비의 소생인 진한후(辰韓侯) 왕유(王愉)와 더불어 “동성(同姓)에게 장가듦이 불가하다.”라고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동성이라 함은 부계가 아니라 모계를 지칭한 말로, 인경현비와 인예태후는 모두 이자연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후사가 없이 죽자, 형인 선종은 불교식 장법으로 화장한 유골을 자연에 뿌리는 장례법인 산골장(散骨葬)을 피하고 후장(厚葬)하도록 하였으나, 유사(有司)에서 따르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수태위(守太尉)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고, 식읍 3천 호에 식실봉(食實封) 5백 호를 지급받았다.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기덕, 『고려시대 봉작제 연구』 (청년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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