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 ()

고려시대사
유적
고려 전기, 제5대 왕 경종과 왕비 헌숙왕후 김 씨가 묻힌 왕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고려 전기 왕릉
건립 시기
981년(경종 6)
관련 국가
고려 왕조
관련 인물
경종|헌숙왕후
정면 너비
14.8m
측면 길이
45.9m
높이
2.3m
지름
8.6m
재질
흙|돌
소재지
북한 개성특급시 판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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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영릉은 고려 전기 제5대 왕 경종과 왕비 헌숙왕후 김 씨가 묻힌 왕릉이다. 경종이 981년 승하하여 경기 남쪽 영릉에 묻혔고, 이후 헌숙왕후 김 씨의 사후에 합장되었다. 능제는 고려 전기의 전형적인 4단이고, 봉분 주위에 12각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 우석 및 면석이 있다. 석사자로 추정되는 석수 3기가 있다. 입체감이 있는 문인석 1쌍은 양관을 쓰고 두 손에 홀을 들고 있는데,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조각 솜씨를 보인다. 능 아래쪽에서 비석을 받쳤던 거북 받침돌이 발견되었고,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이 있다.

정의
고려 전기, 제5대 왕 경종과 왕비 헌숙왕후 김 씨가 묻힌 왕릉.
건립 경위

영릉(榮陵)은 북한 개성시에 있으며 현재 북한의 보존급 유적 제56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사기릉’, '처녀릉'으로도 불린다. 고려 제5대 왕 경종(景宗)은 토지 제도로서 전시과(田柴科) 제도를 처음 제정했으며, 송(宋)나라와 교류하고 여진(女眞)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통치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던 임금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경종은 981년(경종 6) 7월 병오일에 정전(正殿)에서 승하하여 경기(京畿) 남쪽 산기슭에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경종의 왕비인 헌숙왕후(獻肅王后) 김 씨가 승하하자 영릉에 합장되었다.

형태와 특징

영릉의 영역[陵域]은 3,880㎡ 정도 되고, 현재 북한의 보존 및 보호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능역은 경사면에 4단으로 축조되어 있어 비교적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봉분(封墳)은 제1단의 중심 부위에 동남향으로 위치하였다. 원래 동쪽, 서쪽, 북쪽으로 곡장(曲墻)을 둘렀으나 현재는 그 흔적만 미미하게 남아 있다.

제1단에 있는 봉분은 12각으로 축조하였다. 그런데 봉토(封土)가 유실되고, 뒤쪽에 있는 산에서 흘러 내려온 흙이 병풍석(屛風石)의 대부분을 매몰하여 앞쪽에만 병풍석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을 1995년 개성시 문화 유적 관리소에서 보수 정비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때 주로 병풍석을 정비하여 봉분을 보충하였으며 능역에 잔디를 심었다. 1963년 조사 당시 봉분의 높이는 138㎝, 너비는 519㎝였으나, 현재의 봉분 높이는 230㎝이고, 직경은 860㎝이다.

병풍석의 면석은 비교적 큰 판석을 세웠고 우석(隅石)과 면석(面石)들이 있다. 지대석(址臺石)은 매몰되어 있다. 본래 면석에는 십이지 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는데,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 작용으로 크게 마멸되어 확인되지 않는다. 병풍석의 일부 구간은 보수하면서 막돌로 보충하였다. 병풍석 한 변의 길이는 250㎝, 높이는 850㎝이다. 제1면석과 제12면석의 모서리 돌이 중심 선상에 놓여 있다. 병풍석의 면석에서 150㎝ 간격으로 복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와 병행하여 난간석(欄干石)을 둘렀다. 난간 가로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난간 기둥만 일부 남아 있다. 난간 기둥은 모를 죽인 방형(方形)의 돌을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현재 난간 석주(欄干石柱) 6개와 동자 석주 4개가 남아 있다. 북쪽 서측면에 있는 난간 석주 1개는 넘어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난간 석주의 높이는 105∼110㎝이고, 동자 석주의 높이는 40∼45㎝이다.

봉분의 주변에는 석호(石虎) 3기가 남아 있는데, 정면에 2구, 북쪽 측면에 1구가 있다. 봉분 앞쪽에 웅크린 모습으로 앉아 있는 2구는 비교적 정밀하게 조각되었다. 북쪽 측면에 있는 석호는 넘어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며 크게 파손되었다. 석호의 앉은키는 89.1∼89.5㎝이고, 얼굴 너비는 32㎝이며, 가로 너비는 63㎝이고, 세로 너비는 93㎝이다. 제1층단과 제2층단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동쪽 왼쪽에 만들었다.

제2단에는 동서 양쪽으로 문인석(文人石) 1쌍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이들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들었는데, 모두 하나 같이 대석(臺石) 위에 서 있다. 그 모습은 양관(梁冠)에 조복(朝服)을 입고 홀(笏)을 든 형태인데, 그 표현은 대체로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 서쪽의 문인석은 높이 161㎝, 얼굴 너비 33㎝, 어깨 너비 47.5㎝이고, 두께는 28.4㎝이다. 장명등(長明燈), 석상(石床), 망주석(望柱石)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表石)이 전하고 있다. 제1층단 앞면에는 비의 대석(臺石)과 판석이 깔려 있다. 제4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남아 있다. 무덤 아래에서 동남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서 머리돌이 없는 거북 받침돌이 발견되었다.

해방 이후 1983년 널방을 발굴한 결과 현실(玄室)은 남북 길이가 3.55m, 동서 너비가 2.9m, 천정 높이가 2.25m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벽면과 천정에는 화강석을 배치하고 그 위에 회를 얇게 발라 벽화를 그렸을 것이나 대부분 박락되어 그림의 종류는 알 수 없다. 널방 중앙에는 관대(棺臺)와 유물 받침대가 놓여 있다. 대부분 도굴을 당하였고 출토 유물은 몇 점의 자기 조각에 불과하다.

현재 능침과 석물의 배치는 1995년 개성특급시 문화 유적 관리소에서 보수 정리를 한 것이다.

의의 및 평가

고려 제5대 왕 경종과 왕비 헌숙왕후의 합장릉(合葬陵)인 영릉은 고려 초기의 능제(陵制)와 규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영릉에는 병풍석, 난간석, 석수(石獸), 문인석 및 거북 받침돌 등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석수와 문석인 및 거북 받침돌이 주목된다. 석수는 사자 형상으로 통일 신라의 사자의 여운이 남아 있다. 문인석은 조복에 양관을 쓰고 홀을 든 모습인데,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당대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고려 왕릉에는 비석이 남아 있지 않아 능주(陵主)를 알아보기 어려운데, 영릉에도 비석은 전해지지 않으나 비석 받침돌이 거북형으로 남아 있어서 비석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1983년 영릉의 발굴 결과 널방 벽면과 천정에는 화강석 위에 회를 발라 벽화를 그린 흔적이 남아 있는 점도 주목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13)

논문

장호수, 「개성지역 고려왕릉」(『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2000)

기타 자료

조선총독부,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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