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동쪽에 있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과 사숙태후 이씨의 합장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건립 시기
고려 전기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선종, 사숙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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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인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동쪽에 있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과 사숙태후 이씨의 합장릉이다. 선종은 1094년(선종 11) 5월 임진일에 연영전에서 사망하였고 빈소는 선덕전이었다. 이후 장례는 22일 뒤인 5월 갑인에 도성의 동쪽에 능침을 조성하였다. 정비인 사숙태후 이씨가 1107년(예종 2)에 사망한 후 합장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수직군을 두어 왕릉을 관리하였으나 무신의 난 이후 관리 소홀로 위치를 잃어버렸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그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동쪽에 있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과 사숙태후 이씨의 합장릉.
건립경위

고려 제13대 선종(宣宗) 왕운(王運)은 제11대 문종(文宗)과 인예왕후(仁叡王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형인 제12대 순종(順宗)이 병약하여 재위 3개월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1094년(선종 11) 2월 열병식을 한 뒤 5월 임진일에 연영전(延英殿) 내침(內寢)에서 나이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獻宗)이 당일에 선덕전(宣德殿)을 빈소로 삼아 같은 달 2일에 개성(開城) 동쪽에 안장하고, 능호를 인릉이라 하였다. 선종의 사후 정비인 사숙태후(思肅太后)는 왕태후가 되어 11살의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주1. 이듬해 이자의(李資義)의 난으로 섭정으로 거두고 헌종도 숙부인 제15대 숙종(肅宗)에 의해 축출되었다. 1097년(숙종 2) 아들 헌종의 사후에도 궁에서 살다가 1107년(예종 2) 승하하여 선종 인릉에 합장되었고, 선종묘(宣宗廟)에 배향되었다.

변천

『고려사』 위숙군(圍宿軍)조에 의하면 인릉은 산직장상(散職將相) 2명이 능을 수호하였던 것이 확인되어, 능침제도를 마련한 고려 왕실에서 제릉서(諸陵署)를 두어 왕릉 뿐만 아니라 왕후릉도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신란 이후 고려 후기부터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인릉의 위치를 알 수 없다.

형태와 특징

선종과 사숙태후의 인릉은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도성(都城)의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어 주2나 무덤칸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장경희, 『고려 왕릉』 (예맥, 2008)
장경희, 『고려왕릉(개정판)』 (예맥, 2013)

논문

김인호, 「고려시대 국왕의 장례절차와 특징」 (『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2010)
윤기엽, 「고려 혼전(魂殿)의 설치와 기능」 (『한국사상사학』 45, 한국사상사학회, 2013)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 여조왕릉등록을 중심으로」 (『한국중세고고학』 5, 한국중세고고학회, 2019)
주석
주1

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에 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다. 우리말샘

주2

묘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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