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왕(忠肅王)은 1339년(충숙왕 복위 8) 3월 계미일에 세상을 떠났다. 충혜왕(忠惠王)이 같은 해 6월 기유일에 왕실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며 능호를 의릉(毅陵)이라 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3월에 공민왕(恭愍王)은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아버지인 충숙왕의 의릉을 이장(移葬)하고자 하였다. 이에 지신사(知申事) 염흥방(廉興邦)과 판사천감사(判司天監事) 진영서(陳永緖)에게 이장할 곳을 살펴보게 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개성 연경궁(延慶宮) 북쪽 송악산 기슭 만월동에 있는 광명사(廣明寺)이다.
고려시대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라는 담당 관서에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고, 왕릉을 위숙군(圍宿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듯이 의릉에도 위숙군을 배치하였다. 조선 태종(太宗)은 1401년(태종 1)에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 현종(顯宗)의 선릉(宣陵), 문종(文宗)의 경릉(景陵), 원종(景陵)의 소릉(韶陵)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인 개성부(開城府)의 수령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대다수 왕릉은 그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으나, 여기에 충숙왕 의릉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순조(純祖)가 1818년(순조 18)에 고려 왕릉의 능주(陵主)와 소재가 확실한 30기에 표석(表石)을 세울 때나, 고종(高宗)이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 57기를 조사하고 표석을 세울 때에도 충숙왕의 의릉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릉은 단지 개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묘제(墓制)나 널방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강화도읍기(江華都邑期) 이후에 왕릉이 진전사원 근처에 조영(造營)되고 있었던 시대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광명사 부근에 충숙왕의 무덤인 의릉이 소재했을 가능성은 상존(尙存)한다.
충숙왕 의릉은 고려 및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개성에 조영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원 간섭기(元干涉期)에 영건(營建)된 나머지 왕릉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