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에 있는 고려시대 제1대 태조와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
이칭
이칭
왕건왕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합장릉
건립 시기
943년(태조 26)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고려 태조|신혜왕후
소재지
개성특별시 개풍군
내용 요약

현릉(顯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에 있는 고려시대 제1대 태조와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이다. 개성특별시 서쪽 만수산 남록에 있으며, 북한 국보급유적이다. 1992년 태조 현릉의 널방을 발굴하여 벽화를 발견하고, 부장품들이 출토되어 현재 개성특별시 고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2년 태조 현릉을 방문한 김일성의 지시로 1994년 태조 현릉을 헐고 왕건왕릉을 개건하여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에 있는 고려시대 제1대 태조와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
건립경위

고려 제1대 국왕 태조 주1(王建, 재위 918~943)의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융(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궁예의 부하가 되어 전공을 쌓아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자 홍유(洪儒) · 배현경(裵玄慶) · 신숭겸(申崇謙) ·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철원에서 고려를 세우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이후 930년 후백제견훤을 물리치고,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943년(태조 26) 5월 고려 태조는 죽음이 임박하자 왕릉을 조성할 때 한나라 문제(漢文帝)나 위나라 문제(魏文帝)의 산릉을 예로 들어 검소하게 조성하도록 하였다. 29일 병이 더욱 심해지자 신덕전에 주2하여 주3를 기초하게 하고 산릉 제도를 검약하게 하도록 하고, 67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송악의 서록에 안장하였다.

태조비 유씨(柳氏)는 본관이 정주(貞州)이고, 아버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천궁(柳天弓)인데, 왕건이 궁예의 장군일 때 혼인을 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즉위하자 왕비로 봉해지고 신혜왕후(神惠王后)로 추봉되었다. 943년 태조의 사후 현릉에 안장되자, 왕후도 함께 부장되어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태조 현릉의 위치와 능제

태조 현릉은 『 고려사』에는 송악의 서록이라고 하였는데,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송악산 서쪽 파지동 남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곳은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에 자리하며, 개성특별시 서쪽의 만수산 줄기에서 남쪽으로 밋밋하게 뻗은 능선에 조성되어 있다.

이 능선의 동 · 서 · 북쪽의 세 면은 만수산 꼭대기에서 뻗어 내린 나지막한 언덕들에 의해 둘러 막혀 있으며 남쪽에는 넓지 않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태조 현릉 앞으로는 서쪽에서 시작된 개울이 평지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현릉의 주변에는 공민왕 현정릉, 칠릉, 명릉, 선릉, 제국대장공주 고릉 등 많은 고려왕릉들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고려 태조의 현릉은 200보의 능역으로 되어 고려왕릉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동서 방향으로 석축대를 쌓아 3단으로 구획하고, 제1단에는 높이 3m 정도의 봉분을 두고, 12각 주4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설치하고, 주위에 주5을, 전면의 좌우에 주6을, 중앙에 주7을 배치한다. 제2단 중간에는 장명등을, 그 좌우에 주8 1쌍을 배치하며, 제3단에는 정자각이 자리한다.

봉분 주위 병풍석에 주9을 새긴 호석을 두르고 주10주11을 배치하는 것은 신라의 능제를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에 장명등이나 주12을 추가하고, 제향을 위해 정자각을 배치한 것은 고려적인 요소이다. 이렇게 완성된 고려왕릉의 특징은 조선에 계승되어 조선왕릉의 전범이 되었다.

태조 현릉의 변천

현릉은 제1대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이다. 고려는 국왕의 사후 황제에게만 올리는 묘호(廟號)주13를 갖추어 올렸다. 고려 제1대 국왕인 왕건 또한 사후 묘호는 태조, 능호는 현릉(顯陵)이라고 올렸다. 태조 왕건 이전에 묘호를 사용한 경우는 신라 때 주14가 제29대 국왕이 되고 태종무열왕이라고 유일하게 종호(宗號)를 묘호로 올렸던 것과 비교된다.

한편 왕건은 916년 고려를 건국하고 즉위하면서 아버지 용건의 묘호는 세조로 추존하고, 어머니의 휘호는 위숙왕후로 추존하였다. 아버지의 무덤에는 능호를 올려 창릉(昌陵)이라 추숭하였고 어머니를 합장하였다. 이렇게 국가를 개국한 태조의 조상을 추존하여 묘호와 능호를 올리는 것은 중국 송이나 금에서 찾을 수 있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 선대에게 묘호와 능호를 올리는 것이 계승되었다.

고려 태조는 스스로 천자(天子)를 자처하였으며, 고려 광종 이후에는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던 황제국이었기 때문에, 고려 국왕의 사후 주15에 대한 예제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 상정고금예문』에도 국왕의 흉례에 대한 연대기적인 기록만 단편적으로 실려 있을 뿐이다.

고려는 외침을 당할 때마다 태조의 현궁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기 위해 여러 차례 천장을 하였다. 거란의 침입을 당하였던 현종 때 재궁을 부아산(負兒山, 북한산) 향림사(香林寺)로 옮겼다가 1016년(현종 7)에 복장(復葬)하였다. 하지만 1618(현종 9) 다시 태조의 재궁을 향림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1619년(현종 10)에 다시 복장하였다.

1232년(고종 19) 7월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할 때 창릉의 세조와 현릉의 태조 관을 강화도로 옮겨 창릉과 현릉을 조성하였지만, 현재 강화도의 어느 곳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희종의 석릉(碩陵), 원종정순왕후의 가릉(嘉陵), 강종비 원덕왕후의 곤릉(坤陵)이 조영되어 있는 강화도의 진강산(鎭江山) 일대가 유력하다.

1261년(원종 2) 9월 원종이 창릉과 현릉 및 고종의 홍릉(弘陵)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세 왕릉이 강화 궁성에서 가깝고 한꺼번에 참배가 가능한 것으로 보아 홍릉 인근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1270년(원종 11)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세조 창릉과 태조 현릉의 재궁을 개경으로 옮겨 니판동(泥板洞)에 태묘를 짓고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모셨다. 1276년(충렬왕 2) 태조와 세조의 재궁을 원래의 현릉과 창릉에 복장(復葬)하였다.

고려 왕실은 태조 현릉을 관리하기 위해 위숙군 4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12월 기해일에 공민왕제릉서(諸陵署)를 관할하는 주16에게 법도에 맞게 하도록 제릉전직(諸陵殿直)을 새로 선발하였다. 공민왕은 이듬해 1372년(공민왕 21) 11월에 태조 현릉에 제사를 올렸다.

조선시대에 고려왕릉의 관리는 예조에서 담당하도록 『 경국대전』에 제도화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 현릉을 비롯하여 현종 선릉과 문종 경릉 및 원종 소릉은 지방 고을의 수령이 해마다 돌아보고 속호(屬戶)를 두어 관리하였으나, 그밖의 고려왕릉의 관리는 소홀하여 황폐해지면서 능주를 잃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1432년(세종 14) 고려 태조 현릉은 매년 한식 때마다 잡목을 제거하며 보살피게 하였고, 1456년(세조 2) 고려 태조 현릉에는 3호(戶)의 수릉호(守陵戶)를 정하여 수호하였다. 하지만 이미 성종주17』에 의하면 능호를 알 수 있는 고려왕릉은 43기에 불과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려왕릉은 다시 방치되어 1662년(현종 3)에 고려왕릉의 보수와 관리, 주18 등을 조사하여 『 여조왕릉등록』에 기록하였다.

1670년(현종 11) 현릉의 북쪽 병풍석 8-9편이 기울어져 있어 10월 9일 묘시에 고유제를 지내고, 160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무너져 내린 곳의 구멍을 흙으로 막고 지대석과 병풍석 및 만석을 안배한 후 유회로 막고 묘 위에 사초까지 일신하여 10월 21일 공사를 완료하였다. 1685년(숙종 11)에는 병자호란 이후 불에 탄 현릉 재실을 조성하였다.

현종 대에 고려왕릉은 3년마다 한차례씩 예조의 낭관을 보내어 살펴 보도록 정례화하였고, 숙종 대부터 고종 대까지 3년 1회마다 간심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고려왕릉은 관리 소홀로 고려 태조 현릉 이외에 능주를 상당수 잃어버렸는데, 1818년(순조 18) 2월 능주와 소재가 확실한 고려왕릉 30기, 1867년(고종 4) 고려왕릉 57기의 능호를 확인하여 봉분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다.

현릉 외에 찾아낸 고려왕릉에 대해서는 고려 태조 현릉 앞에 세운 ‘고려현릉개수실기비’에 전말을 기록해 두었다. 1872년(고종 9) 3월 6일 고려 태조 현릉에 나아가 전작례를 친히 거행하기도 하였다.

1916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이 표석을 근거로 고려왕릉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를 기록하였다. 1930년 간행된 『일본지리풍속대계(日本地理風俗大系)』에 의하면 태조 현릉의 오른쪽에는 비각(碑閣)이 있었다. 비각 내 능비의 정면에는 ‘고려태조왕현릉 신혜왕비유씨부(高麗太祖王顯陵 神惠王妃柳氏祔)’라고 부조되어 있어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릉임을 밝히고 있으나 능비는 현존하지 않는다.

1950년 6 · 25전쟁 중에 현릉의 정자각이 파괴되었고, 1954년에 옛 모습대로 중수하였다. 1994년 북한에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기려 태조 현릉을 헐고 그 위에 ‘왕건왕릉’으로 개수하면서 원래의 태조 현릉에 있던 능묘 조각들은 지하 현궁에 벽화와 함께 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왕릉의 원형이자 조선왕릉의 전범이었던 태조 현릉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태조 현릉 문석인 조각과 왕건 초상 조각의 특징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영조 때에는 개성 유수를 시켜 고려 태조의 능침 석물과 정자각을 고쳤다. 이후 여러 번 보수하면서 고려 때의 원형과 달라졌고, 일제강점기에 여러 번 도굴을 당하여 몹시 파괴되었다. 조선 후기 주19의 초석 위에 규모가 큰 능문을 새로 세웠다. 넓은 능역에 있던 현릉의 정자각은 1950년 폭격으로 파괴되어 1954년 옛 모습대로 복구해 놓았다.

봉분 앞에는 사각기둥 모양의 상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상석의 한 면에는 나무 아래 한 쌍의 새가 입에 꽃가지를 문 형상이 부조되어 있다. 이러한 문양은 통일신라시대 함조문(含鳥紋)과 양식적인 친연성이 있어, 태조 현릉이 고려 전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상석의 좌우에는 1쌍의 문인석이 마주 서 있다. 태조 현릉 석인상 1쌍은 242㎝의 높이에 주20을 쓰고 소매가 넓은 조복을 입었으며 양손을 모은 채 수직으로 을 든 모습이다.

통돌이면서 얼굴과 어깨 그리고 의복 전체의 폭이 거의 그대로 원통의 기둥에 가까워 전체적으로 육중함이 강조되고 있다. 얼굴과 관의 크기는 거의 일치하며, 관은 3면으로 나뉘어 있어 진현관에 가깝고 앞쪽 중앙은 규(圭) 형태이고 뒤쪽으로 구획이 되어 있다. 이러한 관의 형태나 의복은 통일신라 흥덕왕릉에 서 있는 문신상보다 간략화되고 소략하여 고려 후기 왕릉의 석인상들과 양식적으로 비슷하여 천장된 이후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문석인이 착용하고 있는 진현관은 태조 현릉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 출토된 951년경에 조성되었다는 고려 태조 왕건상(높이 138.3㎝)의 것과 흡사하다. 국내 연구자들은 이 조각상을 태조 현릉에서 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왕건의 초상조각으로 보지만, 북한 학계에서는 태조 현릉에서 조금 먼 곳에서 출토되어 태조의 초상조각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서인지 북한의 국보나 보물 목록에는 빠져 있다.

다만 등신대의 왕건 초상 조각은 벌거벗은 채 머리 위에 관을 쓴 특이한 형태이다. 관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24양의 주21을 쓰고 있으며 비녀로 고정시켰다. 관의 안쪽에는 해와 달을 형상화시킨 원형판이 전후좌우와 그 사이 사이에 총 6개가 배치되어 있다.

내부 구조와 출토 유물

무덤 내부는 안길, 무덤문, 주22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 내부는 일제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도굴되어 몹시 파괴되어 있다. 벽은 떨어지고 문쪽 바닥에는 흙이 차 있었으며, 북쪽벽 모서리에는 도굴할 때 뚫어놓은 구멍이 나 있었다. 안길은 널방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길이 30m이다.

태조 현릉의 무덤문은 모두 4개를 설치하였는데, 첫 문은 돌문이고 나머지 3개의 문은 철문이다. 널방은 동서 길이 320㎝, 남북 길이 340㎝, 높이 217㎝이다. 널방은 통돌로 방을 마련하고 벽에는 회반죽을 하여 주23 기법으로 벽화를 그렸다. 주24는 북쪽벽에 치우쳐 가운데 놓여 있는데, 길이는 298㎝, 너비는 80㎝, 두께는 34㎝이다. 천장은 고구려의 무덤 형식을 계승하여 한 단의 평행고임을 한 평천장으로 되어 있다.

관대의 양편 벽 밑에는 주25를 놓는 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활짝 핀 꽃이 먹선으로 그려져 있다. 벽화는 도굴로 인해 일부 손상되었으나 천장에는 몇 개의 별들이 동서로 늘어져 있다. 서쪽 벽 중앙에는 늙은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두 개의 굵은 소나무가 대각으로 얽혀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백호의 흔적과 여러 개의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다.

동쪽 벽 중앙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좌우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묵선으로 윤곽을 그린 청룡과 작은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다. 북쪽 벽은 심하게 퇴색되어 있는데, 구도나 색상으로 보아 현무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현재는 고려 현릉의 현실 벽화를 영구 보존을 위해 유리 차단막을 설치하였다.

1992년 7월 태조 현릉의 널방을 발굴하였다. 이때 청동주전자 1개, 옥장식품 2개, 청자상감무늬박이잔 1개, 금동장식품 1개, 금동고리 1개, 금동못 2개, 쇠고리 2개, 쇠자물쇠 1개, 주26 등 여러 가지 장식이 나왔다. 능의 북쪽으로 약 500m 지점에서 청동제 왕건의 초상 조각과 옥띠 장식과 붙임판, 금동 띠고리와 여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현재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왕건왕릉의 형태와 특징

현재의 왕건왕릉은 1992년 태조 현릉을 방문하였던 김일성의 지시로 1994년 1월 31일에 헐고 그곳에 개건 공사를 통해 새로 세워진 것으로서 고려왕릉의 일반적인 규모나 석물 조각 및 정자각에 큰 변화가 있다. 2익공식 건물에 맞배지붕의 겹처마 형식에 단청을 칠한 정자각 형식의 주27을 새로 세웠다.

제당 안에는 왕건의 초상을 비롯하여 그의 생애를 대표할 일곱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제당의 동쪽 맞은편에 새로 세운 비각에는 조선 고종 4년(1867)에 고려 태조 현릉을 중수할 때 세웠던 ‘ 신도비’와 1994년 왕건왕릉을 세울 때 새로 조성한 ‘개수기실비’가 세워져 있다.

왕건왕릉은 고려왕릉의 형식을 따라 3단으로 축조하였지만, 규모와 조각상의 형태나 문양 및 양식은 20세기 북한의 미의식을 반영한다. 1단의 봉분은 봉토의 높이 8m, 지름 19m이며, 12각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병풍석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및 십이지신상을 현대적으로 변형시켜 장식적으로 새겨 놓았다. 무덤의 네 귀에는 무섭고 사나운 돌호랑이 네 마리를 배치하여 해학적인 전통 석조각과 미의식이 크게 달라졌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석등을, 그리고 양옆에는 망주석을 세웠다. 2단과 3단에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그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특정한 문인 4명과 무인 4명의 초상 조각을 배치하여 통일 의지를 강조하였다. 문석인은 동쪽에 배치하되 위쪽부터 최언휘, 홍유, 최지몽(崔知夢), 김부(金傅)를 형상화하였다. 무석인은 서쪽에 배치하되 위쪽부터 유금필(庾黔弼), 신숭겸, 배현경, 대광현(大光顯)을 형상화한 것이다.

현재 왕건왕릉의 지하 석실은 고려 태조 현릉의 널방을 확장하여 원래의 벽화는 그대로 두고 안길 양옆에는 개건 이전 태조 현릉의 병풍석에 해당되는 12지신을 형상한 면석 12개를 6개씩 양쪽 벽에 배치하고 있다. 원래의 태조 현릉에 세워져 있던 석호나 문석인들도 내부에 배치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태조 현릉은 왕건의 사후 943년에 한문제나 위문제의 예를 따라 검소하게 조성하여 신혜왕후 유씨까지 부장한 합장릉이다. 거란 및 몽고의 침입 때 재궁을 천장하였다가 복장하기를 거듭하여 능제와 내부 구조와 벽화 및 출토 유물 등에서 고려 전기부터 고려 후기까지의 특징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태조 현릉의 능제는 동서 방향의 석축대를 쌓고, 제1단에는 봉분과 12각 병풍석 및 난간석을 두르고 그 주위에 석호와 망주석 및 상석을 배치하였다. 제2단에는 장명등과 좌우에 문인상 1쌍, 제3단에는 정자각이 자리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고려 태조 현릉은 봉분 주위 병풍석에 십이지신상의 호석을 두르고 석수와 석인상을 배치하는 신라의 능제를 발전시키고, 장명등이나 망주석을 추가하고 제향을 위해 정자각을 배치하였다.

고려 태조 현릉에서 보이는 고려왕릉의 특징은 조선에 계승되어 조선왕릉의 전범이 되었다. 다만 1994년 북한 당국에 의해 고려 태조 현릉을 헐고 그 자리에 왕건왕릉을 개건하고, 원래의 석실 내부를 넓혀 여기에 병풍석의 십이지신상이나 석호 및 문석인상을 배치하여 그 원형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향토대백과』(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 한국평화문제연구소, 2005)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논문

박형열, 「고려왕릉의 특징과 변천」(『고고학』 제20권 제1호, 2021)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 2019)
정해득, 「강화 고려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한국중세고고학』 4, 2018)
장경희, 「고려왕릉의 석인상」(『조선왕릉 석물조각사』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16)
장경희, 「12세기 고려, 북송, 금 황제릉의 비교연구」(『동방학』 30, 2014)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 2013)
정은우, 「고려 청동왕건상의 조각적 특징과 의의」(『한국중세사연구』 제37집, 2013)
기쿠다케 준이치, 「고려시대 나형남자기상(裸形男子倚像): 고려 태조 왕건상 시론」(『미술사논단』 21집, 2005)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고려의 제1대 왕인 ‘태조’의 본명.    우리말샘

주2

임금의 나들이.    우리말샘

주3

임금의 유언.    우리말샘

주4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5

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    우리말샘

주6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7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9

십이지를 상징하며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가지 동물의 상(像). 대개 같은 모양의 관복을 입고 머리만 동물 모양을 하고 있는데, 능이나 묘의 둘레돌에 조각되거나 관이 들어 있는 방의 내부에 벽화로 그려져 분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우리말샘

주10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石物)의 하나. 무덤을 지키게 할 목적으로 무덤 속에 넣거나 무덤 주위에 세운다.    우리말샘

주11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    우리말샘

주12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3

능의 이름.    우리말샘

주14

신라 제29대 왕 ‘태종 무열왕’의 본명.    우리말샘

주15

국민 전체가 복상(服喪)을 하던 왕실의 초상. 태상왕(太上王), 상왕(上王), 왕, 왕세자, 왕세손 및 그 비(妃)의 상사(喪事)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16

고려 시대에,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제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문종 때에, 관제의 축소 개편으로 격하되어 ‘태상부’로 고쳤다. ⇒규범 표기는 ‘태상시’이다.    우리말샘

주17

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우리말샘

주18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    우리말샘

주19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20

문관(文官)이나 유생(儒生)이 쓰던 관. 지위(地位)에 따라서 관량(冠梁)의 수가 달랐다.    우리말샘

주21

황제가 정치나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를 보거나 조칙을 내릴 때 쓰던 관.    우리말샘

주22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 속의 방.    우리말샘

주23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의 하나. 새로 석회를 바른 벽에, 그것이 채 마르기 전에 수채로 그린다.    우리말샘

주24

예전에, 무덤 안에 관을 얹어 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 횡혈식 석실 따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25

장사 지낼 때, 시체와 함께 묻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6

‘귀면’의 북한어.    우리말샘

주27

제사를 지내는 당집.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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