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1204∼1211년. 이름은 왕영(王韺), 초명(初名)은 왕덕(王悳), 자는 불피(不陂)이다. 신종(神宗)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정선태후(靖宣太后) 김씨(金氏)이며, 비(妃)는 영인후(寧仁侯) 왕진(王稹)의 딸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희종(熙宗)은 1200년(신종 3)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이후 신종이 병들어 죽음이 임박할 무렵에 집정자 최충헌(崔忠獻)에게 간곡하게 요청하여, 1204년(신종 7)에 신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책봉하였으며, 1206년(희종 2)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책봉하여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희종 3) 최충헌의 요청으로 유배자 300여 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희종 4) 개성(開城)의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5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한편 희종대에는 최충헌을 살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1204년에 장군 이광실(李光實)의 살해 모의, 1209년(희종 5) 청교역리(靑郊驛吏) 3명이 최충헌 부자의 살해를 모의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최충헌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1211년(희종 7) 희종의 묵인 아래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이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에 따라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당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쫓겨났다.
이후 자연도(紫鷰島: 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에 다시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고종 6)에 개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최성(崔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고종 14)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이(崔怡)에 의해 다시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고종 24)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강화에 장사하여 능(陵)을 석릉(碩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