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쌈

의생활
개념
삼풀 · 모시풀 · 목화 · 누에고치 등에서 실을 자아 삼실 · 모시실 · 무명실 · 명주실을 만들어 삼베 · 모시베 · 무명베 · 명주베를 짜는 전 과정.
이칭
이칭
삼베길쌈, 모시길쌈, 무명길쌈
내용 요약

길쌈은 삼풀·모시풀·목화·누에고치 등에서 실을 자아 삼실·모시실·무명실·명주실을 만들어 삼베·모시베·무명베·명주베를 짜는 전 과정을 말한다. 조선시대까지는 좁은 의미에서 실을 잣는 과정[紡績, 製絲]에 국한되었지만 지금은 넓은 의미로 베를 짜는 방직 과정[紡織, 織造]까지 모두 포함한다. 특히 길쌈은 인류가 식물의 잎이나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입다가 식물의 줄기나 솜에서 실을 만들어 천을 짜 옷을 지어 입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 노동하는 두레길쌈의 형태로 삼을 짓게 된 삼베길쌈이 발전한 것이다.

정의
삼풀 · 모시풀 · 목화 · 누에고치 등에서 실을 자아 삼실 · 모시실 · 무명실 · 명주실을 만들어 삼베 · 모시베 · 무명베 · 명주베를 짜는 전 과정.
어원

길쌈은 원래 ‘삼을 만들다’라는 뜻에서 삼실을 만들어 삼베를 짤 때까지의 과정이었다가 점차 모시베와 무명베를 짜는 작업으로 확장된 것이다. 길쌈의 어원은 고려시대의 속요를 모은 『서경별곡(西京別曲)』에서 “질삼베 바리시고”라고 하던 데에서 확인된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실을 자아서 베를 짜는 모든 과정을 ‘질삼’이라고 불렀다. 1587년에 간행된 『소학언해(小學諺解)』에 의하면 방적부터 직조까지를 의미하는 한자어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질삼ᄒᆞ며 뵈짜며 가업(家業)을 하고(紡績織紝以爲家業)”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길쌈은 실을 잣는 방적 단계까지이고, 베를 짜는 방직 단계는 직조 혹은 직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길쌈'의 옛말은 ‘질삼’인데, 이것이 구개음화와 연동되어 ‘길쌈’이 되었다. 언어학적인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삼[麻]을 만들다”는 의미를 지닌 “짓(製; 짓다) + 삼(麻)”에 의해 “짓삼 > 짇삼 > 질삼 > 길쌈”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곧 ‘길쌈하다’라는 용어는 원래 하나의 동사가 아니라 ‘길쌈을 하다’라는, 즉 삼을 짓는다는 의미의 '삼베 길쌈'이라는 용어의 목적어에서 조사를 생략하고 하나의 동사로 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변천

길쌈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단군은 일찍이 의복 · 음식 · 거처의 제도를 가르쳤고 여인들에게 길쌈을 할 때 온갖 수공을 아끼지 말도록 분부하였다. 서기전 6000-5000년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오산리의 신석기 유적에서 실을 만들 수 있는 방추차가 출토되었다. 서기전 4000-3000여 년 경의 궁산패총에서 방추차가 출토되었고, 지탑리 · 서포항 · 토성리 · 흔암리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방추차가 있다. 이를 통해 이른 시기부터 길쌈을 해 왔음이 입증된다. 특히 궁산패총에서는 골침(骨針)에 감겨 있는 마사(麻絲)가 출토되어 일찍이 삼실의 제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 · 변한 · 진한 지역이 길쌈이 이어졌던 곳이다.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길쌈의 전통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 이사금 때 추석 한가위 풍속으로 길쌈놀이를 한 기록이 있다. 왕이 여섯 부락을 둘로 나누어 편을 짜고 두 명의 왕녀로 하여금 부락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쌈 내기를 하여 심사하여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가무백희를 벌인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어 16세기 초 『신증동궁여지승람』이나 19세기 『동국세시기』에도 계속 기록되었다. 이것이 20세기 초 두레길쌈으로 전승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왕비와 함께 육부를 돌아다니며 농잠을 권장했다. 또, 유리왕 때에는 거국적으로 여자들이 편을 지어 길쌈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사(北史)』에 의하면 “신라는 토지가 기름지고 뽕과 삼이 많았으며 비단과 삼베를 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는 28승 베, 20승 베, 15승 베가 있었다.”라고 하여 삼베길쌈과 명주길쌈이 성행하여 나라에서도 장려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길쌈이 더욱 발달하여 대량의 각종 직물이 특산물로 당나라에 보내지기도 했다.

고려시대

『고려사』에 의하면 길쌈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여 대마와 모시를 가꾸고 누에를 키워 다양한 종류의 직물을 제조하였다. 1123년(인종 원년)에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는 모시와 을 심어 베옷을 많이 입는데, 가장 좋은 것을 깁(絁)이라고 일컬으며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고려시대까지는 삼베, 모시베, 명주베의 생산이 있었다.

특히 고려에서는 매미 날개처럼 가는 모시를 짰는데, 가늘고 섬세하여 베 1필이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릿대 안에 들어가는 ‘발이내포(鉢伊內布)’를 제작하였다. 몽고 공주가 이러한 직물을 보고 중국에까지 소문이 났고,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70여 년 동안 원나라 황제는 무늬를 넣어 짠 모시[花紋紵布]를 보내도록 요구한 적도 있다. 고려 말 1363년(공민왕 12)에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文益漸)이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에 넣고 돌아온 이후 무명베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 때까지 대마와 모시풀과 누에고치로 세마포와 세모시, 세명주와 같이 가늘고 얇고 섬세한 옷감을 짜는 것이 특징이었고, 고려 말에 무명이 들어왔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여성의 길쌈은 장려되었다. 특히 양잠을 하여 비단을 짜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었다. 특히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명나라에서는 금은 세공을 조공으로 요구하였는데 조선의 국왕들은 이것을 대신하여 세명주를 비롯한 염직물로 대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양잠업 또한 국가가 주도하여 관청에서는 잠실을 설치하였고, 각도에서는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여 누에를 기르고 뽕나무를 수급해 누에고치의 안정적인 공급을 도모하여 명주의 생산과 품질을 관리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특히 태종은 누에알의 보급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누에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세종 대에는 농잠서(農蠶書)를 언해하여 양잠 기술을 장려하였다.

세조 1년에는 종상법(種桑法)을 제정, 공포하여 대호(大戶)에 300그루, 중호(中戶)에 200그루, 소호(小戶)에 100그루, 빈호(貧戶)에 50그루씩 뽕나무를 심게 하고, 뽕나무를 잘못 가꾸어 말라죽게 한 농가에는 벌을 주기까지 하였다. 조선시대 규방가사 중 「여자탄식가」에는 “모시낫키 · 삼비낫키 · 명주짜기 · 무명짜기, 다담이러 뵈올보니, 직임방젹 괴롭더라.”는 구절이 있어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모시 · 베 · 명주베 · 무명베의 길쌈에 힘겨워했음이 나타난다. 『사소절(士小節)』에도 실을 뽑고 솜을 타며 옷을 다리고 비단을 마전하는 일은 몸종이 있어도 부녀자가 손수 익혀야 할 핵심적인 일로 기록하고 있다.

근현대

한말까지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에서 여성들은 두레 방식으로 길쌈을 행하였다. 그러나 개화와 더불어 중국 · 영국 · 일본의 면직물이 수입되거나 방직기에 의한 면포를 비롯한 방직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수작업에 의한 전통적인 길쌈은 급감하게 되었다. 이후 대량 생산된 의류가 보급되면서 자급자족하던 옷감 생산은 시장에서 직물을 구매하고 또 소비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1967년 전국을 대상으로 직물의 직조에 대해 조사한 결과 80세 이상의 연로자들은 대부분 길쌈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화와 기계화로 인하여 길쌈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지고, 길쌈을 하던 지역 공동체도 무너졌다. 특히 1977년 1월 국민 보건 향상을 위하여 「대마관리법」을 반포한 이후 삼베의 원재료로 하는 삼베길쌈이 거의 사라졌다. 다만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발전이 늦거나 교통이 소외된 안동 · 한산 · 성주 · 나주 등에서는 지금까지도 전통적인 방식의 길쌈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국가에서는 이들 지역에서 수공 방식으로 식물의 줄기나 솜 및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하였고, 해당 지역에서 이러한 과정이 모두 가능한 장인을 보유자로 인정하여 길쌈을 전수하도록 하고 있다.

길쌈두레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길쌈의 전통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 이사금 때 추석 한가위 풍속으로 길쌈놀이를 한 기록이 있다. 왕이 여섯 부락을 둘로 나누어 편을 짜고 두 명의 왕녀로 하여금 부락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쌈 내기를 하여 심사하여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가무와 백희를 벌였다. 이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음은 16세기 초 『신증동궁여지승람』이나 19세기 『동국세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 두레길쌈으로 전승되었다. 길쌈은 원래 삼풀(대마)에서 삼실을 잣는 일을 공동으로 하여 삼베길쌈이라 했지만, 이후 모시실을 자아 모시 굿을 만드는 모시길쌈이나 목화솜을 자아 무명실을 만드는 무명길쌈도 포함하여 두레로 행하였다. 길쌈두레에서 공동 작업은 실을 만드는 방적 과정이 강조되지만 삼베 · 모시베 · 무명베 · 명주베를 짜기 위한 베날기와 베매기의 경우 지금도 공동의 공간에서 2~3인이 함께 작업하여 두레의 형식을 일정 부분 유지하고 있으며, 베틀 위에서 베 짜기 작업만 각자의 집에서 별도로 행해진다.

방적 길쌈

삼줄기 째고 삼실 삼기

음력 3월 하순경에 삼씨를 파종해서 하지소서 무렵에 벤다. 베어온 삼은 나무칼로 줄기에서 가지와 잎을 전부 제거하고 쓸모없는 삼을 가려낸다. 삼 줄기를 '十'자 형태로 교차시켜 묶고 '삼구덩이'에 넣는다. 재래식 삼굳(삼구덩이)은 비탈진 언덕이나 냇가에 돌을 쌓아 길이 1.5~2m 정도의 아궁이를 만든다. 방 바닥에 더 깊게 골을 파고 돌로 아궁이를 만들어 자갈을 깐 다음 삼을 올려 놓는다. 그 위에 풀을 덮고 다시 흙을 덮은 다음 밑에서 불을 땐다. 덮은 흙을 긴 장대로 구멍을 뚫어 두어 차례 물을 부어 주면 속에서 증기가 생기고 떡시루와 같은 원리로 위로부터 아래로 증기가 내려가 익는다.

이렇게 찐 삼이 마르기 전에 벗겨 적당한 몫으로 나눠 물에 담가 불순물을 뺀 다음 꺼내어 물기를 눌러 짠다. 삼 줄기를 찢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작업을 한다. 눌러 짠 섬유를 왼손으로 감아쥐고 오른손 손톱으로 짼 다음 머리를 톱진날에 놓고 톱으로 날카롭게 만든다. 톱은 쩐지에 걸고 빼어 삼는다. 삼은 삼을 물레에 올려 톳으로 만들고 다시 돌것에 올려 실타래를 둥글게 만든다. 삼 줄기를 왼손 엄지손가락에 휘감아 잡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삼 줄기의 끝 부분을 집는다. 끝부분부터 머리를 빗듯이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삼 줄기 사이에 넣고 아래로 훑어 내린다. 삼 줄기의 길이가 길면 한 번에 훑기 어렵기 때문에 이때는 줄기의 중간을 무릎에 대고 훑는다. 어느 정도 굵기가 되면 가늘게 쪼개야 한다. 이때 왼손으로 줄기를 잡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여러 번 찢는다. 한 묶음의 삼 줄기가 일정한 두께로 찢어질 때까지 반복한다. 다 찢었으면 삼 줄기를 나무로 만든 도마 위에 올린다. 줄기의 끝 부분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에 삼톱을 잡고 껍질을 긁어낸다.

삼 삼기는 삼실을 길게 만드는 작업이다. 하나의 삼실과 또 다른 삼실을 연결하는 것이다. 두 개의 삼실의 끝을 나란하게 만들어 허벅지 위에 올린 다음, 침을 발라 비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하면 길이가 긴 실을 만들어 날실과 씨실로 사용한다. 길이가 길어진 삼실을 물에 적셔 물레에 걸어 주고, 물레를 돌려 실 타래를 만든다. 이 타래는 볕에 말려준 후 다시 타래를 물에 적신 다음, 볏짚을 태워 만든 재로 타래를 덮는다. 이것을 35℃ 정도의 온돌 방에 차곡차곡 포개 놓는다. 그 위에 넓은 천을 덮어 1주일 동안 둔다. 이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주일 후 타래를 꺼낸다. 타래에 묻어 있는 재를 털어준 후, 솥에 넣고 타래를 삶는다. 삶은 타래는 나무 방망이로 가볍게 두드려 주는데, 방망이로 두드리면 타래 표면의 찌꺼기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빨아준 타래를 2~3일 동안 물에 적셨다가 햇볕에 말리는 것을 반복한다. 이렇게 반복하면 누런 타래가 점차 흰 색으로 변한다. 실타래는 다시 잿물에 담가 익혀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하루 2~3차례씩 적시며 햇볕에 바랜다. 이것을 쌀뜨물에 넣어 5~6시간 담갔다가 꺼내 물기가 있을 때 말려 돌겻에 올려 풀어낸다. 풀어낸 삼실은 일정량씩 묶어 날줄과 씨줄로 나눈다.

태모시 째고 모시실 삼기

모시풀은 다년생 풀이며 1년에 3회 벨 수 있다. 첫 번째[初收]는 5월 말부터 6월초이다. 두 번째[二收]는 7월부터 8월까지이다. 세 번째[三收]는 10월 상순부터 10월 하순이다. 이슬 먹은 아침에 모시풀 중 줄기의 굵기가 1.5~2cm 정도로 굵고 2m 가까이 키가 큰 모시풀의 아랫 부분을 낫으로 베고, 베어 온 모시풀 줄기는 잎사귀나 옆지를 모두 다 따 버리고 모시 줄기만 따로 모은다. 모시칼로 모시 줄기의 아래쪽 중간을 꺾은 다음 칼을 집어 넣어 속대를 시원하게 훑어 겉껍질을 모으고 다시 모시톱으로 외피를 벗긴다. 어느 정도 양이 모인 모시 껍질을 묶는데, 이것이 모시베를 짜는 원료가 되는 ‘태모시’이다. 태모시를 1주일 내지 10일 정도 널어서 햇볕에 말리고 이슬을 맞히면 색이 하얗게 바랜다.

모시 째기는 태모시를 가늘게 쪼개는 과정이다. 작업할 분량의 태모시 한 꼭지의 끝부분을 왼손 엄지손가락에 휘감아 모시짝을 만들고, 한 가닥씩 엄지손가락에서 빼어 째기 시작한다. 모시 째기의 기술은 ‘입술과 혀끝 및 이’의 3박자가 딱딱 맞아야 하므로 감각의 숙련이 필요한 작업이다. 짼 모시는 엄지를 제외한 둘째와 셋째 손가락에 끼워 가며 한 가닥을 모두 짼다. 한 가닥씩 풀어 앞니에 넣고 혀끝으로 침을 묻히고 이로 비비고 입술로 쪼개고 짼 부분을 오른손으로 훑어 내려 실을 가른다. 쨈이 좋아야 여러 가닥으로 고르게 쪼갤 수 있고 실이 가늘다. 세모시 짜기는 모시실을 만드는 것이 가장 기초이고, 오랜 숙련이 필요하다. 가늘게 쪼개는 기술은 세모시를 짜기 위한 가장 핵심 기술이다.

째기한 모시올을 널어 놓는 쩐지와 함께 자배기, 모시톱반, 모시톱 등의 도구를 준비한다. 모시 삼기를 위해 먼저 자배기에 물을 넣고 태모시 끝을 모시톱반 위에 올려 모시톱으로 끝 부분을 정리한다. 째기한 모시올을 ‘쩐지’에 걸어 놓는데, 줄기의 아래쪽에 해당되는 부분이 굵은 머리 부분이고, 줄기의 위쪽에 해당되는 부분이 가느다란 꼬리 부분이다. 모시를 삼을 때는 입에 넣고 침으로 대가리와 꼬리 부분을 잇되, 무릎에 대고 비벼서 이어 주는 것이다. 쪼갠 모시를 쩐지에 걸어 두고 긴 실은 길게 짧은 실은 짧게 두어 서로 비벼 준 후 다시 두 개를 동시에 긴 쪽으로 꺾은 다음, 다시 무릎 위에 올리고 비벼서 이어 준다. 삼은 모시실을 쳇바퀴 안에 담는다. 체에는 종이를 바르고 삼은 실을 넣고 한 굿 정도의 길이가 되면 소쿠리에서 꺼내어 한 덩어리의 노끈으로 '十'자 형태으로 매 놓는다. 1굿의 길이는 21미터 60센티이다. 모시 한 필을 짜려면 이러한 모시굿 10뭉치가 필요하다.

명주실 잣기

명주실은 누에고치에서 얻는데 이를 위해 누에를 키워야 한다. 누에는 조선 태종 때부터 국가에서 관장하여 매년 봄 가을에 누에알을 베급하였으며, 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져 군청에서 배급한다.

누에를 키우는 잠실의 습도는 90%, 온도는 27℃ 정도가 적당하다. 대나무 채반에 신문지나 창호지를 깔고 군청에서 배급받은 누에알을 올려 놓는다. 누에를 키우는 곳은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이 좋으므로 너무 어두운 곳은 피한다. 누에알에서 개미누에가 나오면 뽕나무의 새 가지에서 나온 뽕잎 새순을 먹이로 준다. 봄누에를 키울 때에는 오전 10~11시, 가을누에를 키울 때에는 아침 9시~10시 경에 뽕잎을 따는 것이 좋다. 하루 동안 잠을 자고 난 후 개미누에가 허물을 벗으면 2령 누에가 된다. 또다시 약 이틀 반 동안 뽕잎을 먹고 두 번째 허물을 벗으면 3령 누에가 된다. 1령~3령 누에는 애누에라 불리며 누에알에서부터 약 10일 동안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이다. 3령 누에가 3~4일 동안 뽕잎을 먹고 나서 잠을 잤다 깨어나면 큰누애인 4령 누에가 된다. 또, 4령 누에가 5~6일 동안 뽕잎을 먹고 허물을 벗으면 익은누애인 5령 누에가 되는데, 1령누에보다 체중은 2640배가 늘고, 실샘의 크기는 1800배로 커진다. 5령 누에는 6~8일 동안 먹이를 먹고 고치를 60시간 동안 틀기 시작한다.

무명실 잣기

무명실 잣기는 봄에 씨를 뿌린 목화를 가을에 수확하면서부터이다. 씨앗기(씨 빼기)는 채취한 목화송이를 잘 말린 다음 씨아에 물리고 손잡이를 돌리면 씨는 가락 앞으로 떨어지고 솜은 뒤쪽 광주리에 쌓인다. 솜타기(활타기)는 목화를 부드럽게 펴고 티끌을 제거하기 위해 솜활을 한 손에 들고 반대 손에는 활꼭지를 쥐고 삼노끈으로 만든 활줄을 튕겨 진동에 의해 솜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남아 있던 씨앗 껍질도 깨끗하게 떨어뜨린다. 고치말기는 피어오른 솜을 돌돌 말아 실을 빼낼 고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실잣기는 말아 놓은 고치를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이것을 가락에 올리는 것이다. 무명짜기 중에서 가장 어렵고 오랜 숙련과 경험이 필요한 과정이다. 물레의 가랫장에 물렛돌을 얹어 고정시키고 가락을 끼우고 물렛줄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 오른손으로 물레바퀴를 회전시키면 왼손에 쥔 고치 끝에서 실머리에서 실이 풀리면서 함께 도는 가락에 감기게 된다. 가락에 볏짚을 가락옷으로 끼우고 그 위에 면고치를 갖다대고 실 끝과 고치 끝을 함께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릴 때 왼손을 서서히 들어올리면 손끝 고치에서 뽑아져 나온 솜이 합쳐지면서 가늘게 실이 나오게 된다. 보통 물레가 5~6회 회전하면 50~60cm의 실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계속 감아서 가락의 실이 불어나 가운데가 볼록하게 실톳이 만들어지면 실뎅이를 가락옷까지 함께 가락에서 빼낸다. 실뎅이의 가장 굵은 부분의 직경은 약 5cm 정도이고, 가락 끝의 0.5mm 정도는 밖으로 나오게 감는다. 이렇게 가락옷에 감긴 실뭉치를 실뎅이 혹은 실톳이라고 부른다. 무명 한 필을 짜려면 10개의 실뎅이가 필요하다. 날실 80올이 한 새인데 보통 베는 7새 내지 8새이며, 고운 것은 10새 이상으로 짠다.

방직 과정

길쌈두레를 통해 삼실 · 모시실 · 명주실 · 무명실이 만들어지면 날실을 날고[整經], 날실을 바디에 꿴 다음 날실에 풀을 먹이는[加糊] 과정을 두레 형식으로 행한다. 이것을 베틀 위에 올려 꾸리에 감은 씨실을 북에 넣고 베틀 위에서 삼베 · 모시베 · 명주베 · 무명베를 짜는 직조[織造] 작업으로 구성된다.

베 날기

째고 삼은 실을 날실을 만드는 과정인 '실 날기'는 보통 2인이 작업한다. 재료는 1필 분량의 삼실 · 모시실 · 명주실 · 무명실을 10개 분량으로 나눠 놓은 것, 모래나 쌀겨, 먹 등이다. 도구는 실을 담은 그릇, 조슬대, 날틀이다. 날기 과정은 대개 유사하다. 삼실을 삼은 삼굿 10개를 각각의 그릇에 담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쌀겨를 한 줌씩 올려 삼실을 눌러 주면서 서로 엉키지 않고 술술 잘 풀려나오게 해 준다. 각각의 실마리를 찾아서 조슬대 10개의 구멍을 통과시킨다. 뒤를 봐 주는 사람이 앉아 있으면 조슬대에서 풀린 10줄은 ‘새쫓기’의 방식으로 홀수는 위로, 짝수는 아래로 잡으면서 홀수는 잉아올로, 짝수는 사올이 되게 잡는다.

이제 이것을 날틀의 맨 앞쪽에 위치한 참새와 개새에 '∞'자로 걸은 다음 지그재그로 날틀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10자의 길이만큼 난다. 날틀을 한 번 갔다 온 다음에는 먹으로 '개미찍기'를 하여 실마리를 표시한다. 8새에 해당되는 숫자의 분량만큼 조슬대를 거쳐 날틀에 거는 분량이 늘어나 어느새 날틀 위에는 8새, 1필을 짤 만큼의 모시실이 쌓인다. 날기가 끝나면 8새 3모, 10자의 숫자를 세서 확인하고 맨 뒤쪽부터 고리 사슬 모양으로 고를 내어 풀기 좋게 감아 내는 방식은 ‘가침’이며, 두 번 고를 내고 그 사이로 빼내는 고리 사슬은 ‘쌍가침’이다.

베 매기

베 매기는 바디를 끼운 날실의 표면에 콩풀을 먹이면서 맷잿불을 쐬어 단단하게 고정하면서 건조시켜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베틀 위에서 끊어지지 않게 해 주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왕겨로 맷잿불을 피우고 나서 삼베는 이슬이 있고 습기가 많은 무더운 7~8월의 새벽부터 2~3인이 공동으로 베 매기를 시작한다. 베 매기를 위한 재료는 곱게 빻은 생콩가루에 소금 1숟갈을 넣고 물을 넣어 되직하게 만든 콩풀이다. 도구는 도투마리, 들말, 끄싱개, 투가리, 매기솔 등이다. 맷잿불 위에 들말을 세워 놓고 도투마리를 기댄 후 바디에 꿴 모시실을 묶어 준다. 이제 1필 모시실의 나머지 한 끝은 마당 끝 3m 위치에 놓은 끄싱개에 묶고 무거운 맷돌을 들어올려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도투마리와 바디, 참새대, 사침대, 개새대에 끼운 날실 아래에 맷잿불을 넣고, 매기를 위해 투가리에 담긴 콩풀을 준비한다. 뒤 봐주는 1인은 도투마리 뒤쪽에 앉고, 1인은 왼쪽에 앉아 풀칠을 하고, 나머지 1인은 맷잿불 맞은 편에 앉아서 협동하여 작업한다. 풀칠하는 1인이 오른손에 매기솔을 쥐고 살짝 발라 바르고, 날실 위에 오른손으로 골고루 솔질하여 바르고 나서는 왼손으로 실이 젖도록 주물러 준다. 이렇게 매기솔로 풀질을 하면 맞은편에 앉아서 맷잿불의 상태를 봐주거나 풀을 골고루 매만지거나 떨어진 실을 이어 준다. 풀칠한 실이 마르면 바디를 앞뒤로 보내어 날실의 잉아올과 사올을 일렬로 만들어 준다. 매기솔로 풀칠을 하면서 실 표면의 보풀이 없어지고 매끈해지게 만져 주어야 한다. 또 맷잿불의 온도가 뭉근한지, 너무 높지는 않는지 너무 낮지는 않는지 등도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너무 달면 실이 타고, 너무 낮으면 건조가 늦기 때문에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함석 대야를 넣었다가 빼서 모시실이 은근하게 마르도록 해야 한다.

맺잿불에서 작업을 할 때 모시실뿐 아니라 실의 앞뒤로 이동하면서 빗어 준 바디까지 완전히 말라야 나중에 곰팡이가 안 생긴다. 그런데 이때 모시실을 삼은 곳이 떨어지거나 늦어진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확인해서 다시 이어주고 길이를 맞춰 일정한 텐션을 갖도록 다시 이어 주고, 잉아올과 사올을 구분하여 바디 구멍에 다시 꿰어 준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해야 베를 맬 때 베틀에서 베를 제대로 짤 수 있다. 솔질을 하고 맷잿불에 말린 날실을 만져 보아 실뿐 아니라 바디까지 정확하게 마르면, 뒤를 봐 주는 사람이 들말 뒤쪽 도투마리를 감되 날실과 날실이 붙지 않게 뱁댕이를 넣고 쫀쫀하게 감아 준다. 도투마리에 일정한 속도로 감으면, 뒤쪽 끄싱개가 앞으로 조금씩 딸려 온다.

이제 다시 베매기솔로 콩풀을 솔에 살짝 묻힌 후 왼손으로 실 밑에 받치고 오른손으로 실을 주물러 풀이 골고루 배어들게 해 준다. 다시 솔질을 하면서 실이 떨어지면 이어 주고, 보풀이 있으면 매끈하게 잠재우고 맷잿불이 달면 찬재를 넣어 온도를 낮추고, 온도가 낮으면 다시 왕겨에 막대를 넣고 쑤셔 은근하게 말린다. 어느 정도 마르면 바디를 움직여 준다. 바디에 콩풀이 묻어 찌꺼기가 가득 끼면 칫솔을 이용하여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침대도 옮겨 실과 실이 서로 붙지 않게 해 준다. 완전히 마르면 도투마리 사이에 뱁대를 넣으며 감고, 그때마다 끄싱개가 딸려 온다.

1필의 모시 매기는 거의 하루가 걸린다. 매기가 끝나면 끄싱개에 묶어 걸었던 모시실의 끝을 묶었던 매듭을 풀고 잉앗대를 꽂고 텐션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5가닥으로 구분하여 5묶음으로 묶는다. 양쪽 끝 부분인 식서 부분을 먼저 단단하게 묶어 길이를 조정하고, 중간 부분을 다음으로 묶는다. 다 묶은 다음 바디가 내려가는 끝까지 풀칠을 하고 맷잿불에 쬐어 건조시키면서 마무리를 하고, 모든 것이 다 끝나면 도투마리에 감는다. 다 쓴 맷잿불에 물을 붓고 찬재로 다음에 사용한다.

베 짜기

베 짜기는 잉아 걸기와 베 짜기로 구성된다. 이 중 잉아 걸기는 도투마리를 베틀 위에 올리고 잉아를 건 다음 빙어리 등 베틀의 부속 도구를 놓는 것이어서 혼자 하기보다 2인이 협동하면 훨씬 작업이 수월하다.

잉아 걸기

재래식 베틀에 잉아를 거는 도구로는 잉아틀 · 잉아실을 준비한다. 매기가 끝난 도투마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재래식 베틀 위 뒷다리 부분에 도투마리를 걸쳐 둔다. 매기 끝에 매단 잉앗대를 길게 앞으로 끌어 당긴다. 베틀 중앙에 앉은 다음 잉아틀을 왼손에 쥐고 잉아실을 위쪽에 건다. 이제 참새대와 개새대 사이에 걸린 잉아올과 사올을 잉아에 거는 작업을 한다. 가장 왼쪽의 실이 아래로 내려와 있는데, 이것이 첫 번째 잉아올이어서 이것을 잉아실에 걸고 잉앗대 아래에서 잉앗대 위로 'S'자형을 그리며 걸어 준다. 다음 사침대 위의 두 번째 올은 사올이어서 이것은 건너뛴다. 다시 사침대 아래에 있는 세 번째 올은 잉아올이어서 이것을 잉아실에 걸고 잉앗대 아래에서 잉앗대 위로 'S'자형을 그리며 걸어 준다. 잉아틀에 손아귀 힘을 주어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요령이다. 이와 같이 홀수올은 잉아올이고, 짝수올은 사올이어서 이것을 정확하게 잉아실에 잡아채 걸어 주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짜야 할 샛수에 해당되는 모든 올의 잉아 걸기가 끝나고 나면 베틀 위 앉을개를 놓고 앉아 허리에 부테를 두르고 매듭대를 동여맨다. 이제 뒤를 봐 주는 사람이 사침대와 잉앗대를 정리하고 빙어리를 끼우고 누름대를 놓고, 잉아를 용두머리 끝에 매달린 잉아톱에 걸고 베 짜기를 하게 도와준다.

베 짜기

베를 짜기 위한 도구는 베틀 위에 도투마리, 앉을개, 부테허리, 바디집, 바디, 북, 말코 등이다. 베틀에 앉아 부테허리를 잘 정리하고, 바디에 바디집을 끼우고 ‘가슴내기’를 시작한다. 매듭대에 5부분으로 나누어 묶은 부분은 폭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베를 짜기 시작하는 5줄까지는 날실의 폭을 바로 펴고 일정하게 만들기 위해 볏짚 등 부드럽고 두툼한 것을 끼워 넣어 짜는 것이다. 날줄이 일정한 간격과 폭을 이루게 하기 위해 올을 맞추고, 늘어진 곳에는 바늘을 꽂아서 수평을 맞추고 잡아 준다. 가슴 내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베 짜기가 시작된다. 잉아올과 사올 사이의 벌어진 틈으로 씨실을 넣은 북을 던지고 나서 끌신을 당겨 곧바로 바디로 쳐서 자리를 잡게 한다. 날실이 상하로 갈려 'X'자로 벌어지게 되면 그 사이로 북을 던져 넣고 끌신을 끌어 사이를 벌려 바디로 치면서 베를 짠다.

베를 짜는 데 적당한 습기는 모시베에 가장 필요하고 삼베에도 어느 정도 필요하므로 가끔 젖일개로 날줄의 마른 부분을 적셔 주어야 한다. 무명베나 명주베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짤 수 있다. 짜면서 가로의 폭이 줄어들지 않도록 40.8cm 정도의 최활을 끼워 직물의 폭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해 준다. 2치 정도 짜면 도투마리를 밀침대로 밀어서 날실을 풀어 준다. 무명짜기가 끝나면 말코에 감긴 직물은 늘어가고 도투마리의 날실을 줄어들면서 바닥에는 끼워둔 벱댕이가 늘어간다. 마지막에 도투마리에 연결된 톱맞이에 끼웠던 날실의 끝 부분이 드러나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직조한다. 다 짜고 나면 직조자는 부테를 맨 상태에서 가위로 짜여진 직물 위쪽으로 약 5cm 정도의 날실 부분을 잘라낸다. 날실이 잘리며 날실에 끼워져 있던 바디와 비거미, 사침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끝에 남은 날실은 톱[톱실]은 약 1자 정도이며, 잘 거둬서 노끈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동국세시기』
『삼국사기』
『西京別曲』
『선화봉사고려도경』
『小學諺解』
『신증동궁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단행본

서해숙, 『국가무형문화재 제140호 삼베짜기 곡성돌실나이』(민속원, 2020)

논문

도선자, 「남해지역 길쌈두레 운영」(『동아시아고대학』 56, 동아시아고대학회, 2019)
유형천, 「전남지역의 길쌈 어휘 연구」(순천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임형진, 「안동포 생산에 따른 길쌈 노동 교환조직」(『문화재』 34, 국립문화재 연구소, 2001)
이경엽, 「길쌈두레의 구성과 기능」(『한국민속학』 25, 한국민속학회, 1993)
조영연, 「길쌈 용어 의미의 분석적 연구」(공주사범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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