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는 쐐기풀과에 속하는 모시풀의 인피 섬유로 제직한 직물이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저마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고려시대에 들어 모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모시 제직은 모시베기, 태모시 만들기, 모시 째기, 모시 삼기와 모시 굿 만들기, 모시 날기, 모시 매기, 모시 짜기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고운 모시를 짜기 위해서는 모시실을 가늘게 째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및 충청남도 무형유산 '한산세모시짜기'로 지정 전승하고 있으며, 2011년에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시는 대표적인 여름철 직물이다.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 대마와 저마를 구별없이 저마(苧麻)라고 하였으나 이후 『삼국사기』에 '저포(佇布)', 『고려사』에는 ‘세저포 (細苧布), 백저포(白紵布)’ 등으로 기록하여 고려시대에는 대마와 저마를 구별하여 저포라 하였다. 또한 『계림유사(雞林類事)』에 "포왈배(布曰背), 저왈모(苧曰毛), 저포왈 모시배(苧布曰毛施背)"라 기록하였는데 중국에서 저(苧)를 모(牟)와 시(枲)로 구분하면서 毛施, 毛絁, 毛施布 또는 沒絲布라 표기한 것을 고려에서는 한자음대로 모시라고 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는 "毛施, 毛絁也. 紵,方言謂之毛施…"라 하였다.
모시 제직 기술은 『삼국사기』에 40승 백저포, 30승 저포 등의 기록이 있는데 승(升)은 '새'로 옷감의 굵고 가는 짜임새를 세는 단위이며 1승은 경사 80올을 말한다. 따라서 삼십승포는 직물 폭 간에 2,400올의 경사가 정경(整經)되어 제직한 것으로 현재 15승포를 최상의 품질로 취급하는 것을 당시 옷감의 폭과 오늘날의 폭과 비교하면 약 18승 이상의 포가 되므로 상당히 곱게 짠 것임을 알 수 있다. 샛수가 높을수록 실이 가늘기 때문에 이는 곧 모시실을 만드는 기술 또한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는 모시 제직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중국 내에서 거래되었던 고려산 저포 가격은 가는 것이 한 필에 은 1냥(1냥 2전), 중국산은 두 필에 은 1냥 2전 이었음을 보더라도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상에는 20승포의 기록이 있고, 전세 유물로는 1302년 아미타불복장물과 1346년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불복장 유물이 있다. 조선시대는 한산의 저포가 국내의 최고품으로 명성을 얻었던 시기이다.
모시 제직은 모시의 재배와 베기, 태모시 만들기, 태모시 모시 올 째기, 모시 삼기와 날기, 모시 매기와 모시 짜기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삼한시대 이래 동네 부녀자들의 길쌈 풍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⓵ 모시 베기: 잘 자란 모시풀은 1년에 3번 정도 베게 되는데 5월 말에서 6월 초에 초수(初收), 7월에서 8월에 이수(二收), 10월 초순에서 하순에 삼수(三收)를 한다. 보통 이수 때 벤 것으로 만든 모시실 질이 좋다. ⓶ 태모시 만들기: 베어 온 모시대의 잎을 떼어 내고 껍질과 속대를 분리한다. 껍질 중 겉껍질은 모시 칼로 벗긴 후 속껍질만 쓰는데 이것을 ‘태모시’라 하며 1주일에서10일 정도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필요할 때 하루 정도 물에 불려 두었다 사용한다. ⓷ 모시 째기: 태모시를 가늘게 쪼개는 과정으로 모시 올 쪼개기라고도 한다. 이 기술은 모시 짜기 전 과정에서 오랜 숙련이 필요하며 가늘게 쪼개는 정도에 따라 세저, 중저, 막저 등 모시의 품질이 달라진다. ⓸ 모시 삼기와 모시 굿 만들기: 쪼갠 모시 올을 '쩐지'에 걸쳐 놓고 한 올씩 빼서 머리와 끝을 무릎에 대고 비벼 실을 길게 연결하는 과정이다. 처음 1m 정도 삼은 실은 왼손에 감아 실머리인 '가금밥'을 만들어 안쪽에 종이를 바른 보통 소쿠리나 채어 넣고 그 위로 삼은 실을 올린다. 어느 정도 쌓이면 방바닥에 매끼를 십자(十字)로 놓고 채를 엎어 가금밥이 위로 오도록 묶는다. 이것을 '모시 굿'이라 하는데 보통 모시 한 필을 짜려면 모시 굿 10뭉치 정도가 필요하다. ⓹ 모시 날기: 옷감의 길이와 승수(새)에 따라 날실(경사)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모시 굿 10개를 각각의 그릇에 담고 각 모시 굿의 실을 각각 ‘젓슬대’ 구멍에 통과시켜 열 올을 모두 잡아 날틀에 걸어 나간다. 이때 그릇에 담겨 있는 모시실이 헝클어지거나 딸려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모시 굿 위에 쌀겨를 한 줌씩 뿌려 모시 올을 눌러 주는 역할을 한다. ⓺ 바디에 끼우기: 모시 올이 굵기에 따라 '새(승)'가 정해진다. 보통 7새에서 곱게는 보름새(15升)까지 짰으나 요즘은 가는 모시실을 째는 기술과 인력이 부족하여 10새 전후로 짠다. 모시 올 10올을 1모라고 하며 8모, 즉 80가닥이 한 새가 된다. 한 폭에 들어가는 모시 올의 굵기에 따라 8새 3모 등 올을 더할 수도 있고 감할 수도 있다. 바디 살 한 칸에 2올(사올, 잉아올)씩 끼우고 날실이 풀어지지 않게 날과 날을 묶고 모시 올을 다 끼운 후 날 사이를 띄우기 위해 시침대를 끼운다. ⓻ 모시 매기: 모시 올 이음새를 매끄럽게 하고 보푸라기가 일지 않게 하고 제직할 때 바디와 잉아의 마찰력을 줄이고 실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날실에 콩풀을 먹이는 과정이다. 콩풀은 곱게 빻은 날콩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을 넣어 가면서 되직하게 쑨다. 하지가 지나면 소금을 넣지 않아도 된다. 풀솔로 바른 모시 올에 남아 있는 콩풀을 말리기 위해 왕겻불을 미리 준비한다. 양동이에 왕겨를 가득 담고 그 위에 마른 솔가지를 덮은 후 그 위로 콩대를 얹고 다시 솔가지를 올려 불을 붙이고 다 타고 나면 다시 콩대를 올려 태운다. 위는 까맣게 재가 되고, 아래에서 왕겨가 조금씩 타고 있을 때 찬 재를 넣고, 콩대의 불이 사그라들면 찬 재를 더 올려 불의 온도를 너무 뜨겁지 않게 조절한다. 요즘은 가스불로 데운 불판을 사용하기도 한다. ⓼ 꾸리 감기: 씨실로 사용하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꾸리에 팔자 모양으로 실을 감는다. 보통 손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물레를 사용했을 때 감는 속도가 빠르고 쉽기 때문에 요즘은 물레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꾸리는 베짜기 전에 물에 2시간 정도 담가 적신 후 북에 넣고 마르지 않게 비닐로 감싸서 사용한다. ⓽ 모시 짜기: 짜기는 전통 베틀과 개량 베틀을 사용하는데 전통 베틀의 경우 매기가 끝난 도투마리를 베틀에 올린 후 날실에 잉아실을 걸어 잉아를 만든다. 제직은 날실 개구, 씨실 투입, 바디치기, 날실 풀기, 직물 감기 과정의 반복이다. 전통 베틀의 날줄이 교차되는 방법은 용두머리의 쇠꼬리 끝에 오른발을 매어서 줄을 당기면 밑의 줄이 올라가고 발을 뻗혀 줄을 놓아주면 위의 줄이 내려와 교차되는 사이로 꾸리가 담긴 북이 통과하면서 씨실이 날실과 교차되어 짜여 지는 것이다. 모시 짜기 과정에서 건조하면 모시실이 잘 끊어지기 때문에 예전에는 땅 밑으로 움을 파서 베틀을 놓고 짰으나 요즘은 비닐을 치고 가습기나 분무기를 사용하며 습기 조절을 한다. 짜기가 끝나면 베틀에서 내려 자수를 확인한다. 요즘 모시 한 필은 60cm자로 36자로 약 21.6m 길이가 된다.
현재 한산의 모시 짜기는 국가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및 충청남도 무형유산 '한산세모시짜기'로 지정하여 전승하고 있다. 2011년에 '한산모시짜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고 전통 기술로서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