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연릉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29대 충목왕의 능.
이칭
이칭
명릉군 1릉
속칭
명릉떼 1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349년(충정왕 1)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충목왕
높이
230㎝
지름
800㎝
소재지
개성특별시 개풍군
내용 요약

명릉(明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연릉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29대 충목왕의 능이다. 1349년 3월 승하한 충목왕은 개성의 만수산 남쪽 명릉동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개성특별시 개풍군 연릉리 명릉떼에 자리한 3기의 고려왕릉은 북한 보존급 유적들이다. 3기 중 명릉떼 1릉의 봉분 내부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충목왕 명릉으로 여겨진다. 현재 명릉떼 1릉은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만 남아 있고, 석수와 석인 등은 사라진 상태이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연릉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29대 충목왕의 능.
건립경위

충목왕(忠穆王, 1337~1348, 재위 1344~1348) 왕흔(王昕)은 충선왕(忠宣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원나라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는데 재위 4년만인 1348년(충목왕 4) 12월 정묘일에 김영돈(金永旽)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다음 해인 1349년 3월에 명릉(明陵)에 묻혔다. 그의 신주는 24개월간 주1에 두었다가 1351년(충정왕 3) 2월 임오일에 태묘에 부묘되었다.

변천

1348년(충목왕 4) 12월 충목왕은 나이 12세로 승하하여, 다음 해인 1349년 3월 정유일 개성부의 서쪽 10리에 있는 만수산의 남쪽 산록에 장례를 지냈다. 명릉은 개성특별시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만수산의 남쪽 산록에 평지보다 약 10m 높이에 조영하였다. 능역(陵域)은 협소하며 경사가 비교적 급한 산기슭을 깎아내리고 돋아 축조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왕릉의 관리가 부실하여 고려왕릉 중 능주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고 충목왕의 명릉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중종 때에 편찬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에 의하면 만수산 남쪽 산록 중간 지점에 3기의 무덤이 있고 이것들을 속칭 ‘'명릉’으로 불렀지만, 3기 중 어느 것이 충목왕의 명릉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 현종 때인 1662년(현종 3)에 고려왕릉을 조사할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충목왕 명릉을 비롯한 3기의 무덤이 연달아 존재하여 이곳의 지명을 연릉리라 부르고 ‘명릉떼 3릉’으로 불렀다. 당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명릉떼 3기의 무덤은 모두 많이 훼손되어 있었고, 사면 석물이 서 있는 것도 있지만 물러난 것도 있었다.

제1층단에는 중심 부분에 봉분이 있는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었다. 봉분은 주2을 12각형으로 깔아 놓고, 그 위에 주3을 두른 다음 조성하였으며, 주4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왕릉을 관리하고자 1818년(순조 18)에 표석을 세웠고, 1867년(고종 4)에도 마찬가지였다.

명릉떼 1릉의 봉분 정면 중앙에는 1867년에 세운 표석이 서 있지만, 현재는 세 동강이 나 있던 것을 붙여서 세운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명릉에 대해 조사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두 차례나 도굴을 당하였다.

광복 이후 명릉을 비롯한 3기의 무덤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명릉동이었으나, 현재는 개성특별시 개풍군 연릉리 명릉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명릉은 연릉리 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1.5㎞ 떨어져 3기의 능이 연달아 자리 잡고 있는데, 제1릉부터 제2릉은 약 400m, 제2릉부터 제3릉까지는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1963년 명릉떼 1릉의 동쪽으로 도굴되어 노출된 상태여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명릉떼 1릉의 내부에서 벽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명릉떼 1릉을 충목왕 명릉으로 본다. 발굴 조사 후에는 명릉의 병풍석을 잡석으로 쌓아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다.

형태와 특징

명릉의 구조와 형태는 북한 당국에 의해 여러 차례 실시된 실측 조사를 통해 알려져 있다. 명릉떼 1릉은 제1단 중앙에 봉긋하게 솟은 봉토가 있고 그 아래쪽에는 병풍석이 있으며 그 주위를 빙둘러 난간석을 배치하고 있다. 봉분의 네 귀퉁이에는 주5를 배치하고, 제2단에는 주6을 세우며, 제3단에는 정자각을 세우는 구조이다.

1963년 북한 당국이 실측한 바에 의하면 명릉은 봉토의 높이는 243㎝, 주위 둘레는 27m였는데, 2008년의 봉토의 높이는 230㎝, 직경은 800㎝이다. 봉토의 둘레에는 병풍석이 둘러쳐져 있으며, 병풍석은 면돌, 이마돌, 모서리돌, 지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병풍석의 높이는 90㎝인데, 그중 이마돌의 높이는 30㎝이고 면돌의 높이는 60㎝이다. 면돌에는 주7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인해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난간석은 병풍석에서 앞으로 110㎝ 지점에 그와 병행하여 12각으로 설치하였다. 현재 난간석주 12개와 동자석주 12개가 모두 남아 있는데, 자연 풍화로 파손이 심하고 그중 여러 개는 금이 가거나 패어 있다. 난간석주의 높이는 140㎝ 전후이다.

동자석주는 매몰된 상황이 같지 않아 지면에 드러난 높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그 높이는 작은 것이 65㎝에서 큰 것은 120㎝ 정도 된다. 난간 가로대는 대부분 난간석주와 동자석주 사이의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석조각의 경우 1963년 조사 당시에는 봉분의 네 귀퉁이에 석수 4구가 바깥을 향해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주8 또한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정자각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는다.

1963년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능의 동쪽으로 도굴되고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굴 결과 주검칸[현실(玄室)[^9]]의 방향은 남향이며 반지하에 놓여 있다. 주검칸의 남북의 길이는 265㎝, 동서의 너비는 240㎝, 높이는 170㎝이다. 천장은 고임천장이며 바닥의 중심에는 관대가 놓여

관대주10는 곱게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길이 230㎝, 높이 87㎝, 두께 31㎝이다. 관대 양옆에는 유물 받침대가 있었는데, 길이 240㎝가 되는 가공한 길쭉한 돌로 되어 있다. 남쪽에는 문이 있으며 두께 약 40㎝ 되는 큰 돌로 주검칸을 막았다. 벽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북벽에는 연꽃을 그리고 그곳에 날아드는 나비를 그렸다. 천장에는 별 그림이 약간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고려 후기 왕릉 중 조선시대 주11』이나 1662년 『여조왕조등록』 및 1867년 『 고종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능호와 함께 위치가 밝혀져 관리되고 있는, 충목왕 명릉으로 추정되는 왕릉이다. 봉분 주위로 병풍석과 난간석 및 층단의 구분으로 왕릉의 형식은 확인되나, 능묘조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명릉의 주위에는 왕릉급 무덤 3기가 현존하는데, 이 중 1963년 북한 고고학연구소의 발굴을 통해 능의 내부에서 왕릉급에 주로 그려지는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능주가 밝혀진 사례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북한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평화문제연구소, 2005)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논문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 2019)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 2013)
김일권, 「고구려 천문 문화와 그 역사적 계승: 고려시대의 능묘천문도와 벽화무덤을 중심으로」(『고구려연구』 22, 2006)
허흥식, 「고려의 왕릉과 사원과의 관계」(『고려시대연구』 Ⅰ, 2000)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우리말샘

주2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5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石物)의 하나. 무덤을 지키게 할 목적으로 무덤 속에 넣거나 무덤 주위에 세운다.    우리말샘

주6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 왕릉이나 지체 높은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며, 문석인ㆍ무석인ㆍ동자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7

십이지를 상징하며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가지 동물의 상(像). 대개 같은 모양의 관복을 입고 머리만 동물 모양을 하고 있는데, 능이나 묘의 둘레돌에 조각되거나 관이 들어 있는 방의 내부에 벽화로 그려져 분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9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 속의 방.    우리말샘

주10

예전에, 무덤 안에 관을 얹어 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 횡혈식 석실 따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11

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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